텍스트의 눈송이로 걸어들어가는 아이

한달여 생각하기를 멈췄다. 몇 주는 이사준비에 정신이 없었고, 지금은 정착에 바쁘다. 가재 도구들이 자리를 잡고, 생각없이 물건이 집힐 정도가 되려면 몇달은 더 걸릴 듯 하다. 새집과 관련한 서류작업도 한뭉치이고, 매일매일 물건 사다가 나르는 일도 만만치 않다. 이런 때에 나 혼자 고고하게 글이나 쓰고 책이나 읽고 있으면 도리가 아니겠지.

아이와 성경을 읽기도, 엉터리 옛날 얘기도 같이 쉬었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이와 꾸준히 해오던 일이었다. 아이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실은 세상의 모든 아이가 그러하다. 누구나 어린시절 귀기울여 듣던 옛날 이야기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아이들에게는 이야기가 현실이고 현실이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 나는 티비를 보면서 눈물을 짓거나 무서워서 이불 속으로 들어가곤 했다. 그럴 때면 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이야기는 진짜가 아니란다.” 현실과 이야기를 구분하게 되면서 나는 더이상 이야기에 눈물 흘리지 않게 되었다. 나같이 메마른 어른들을 위해서 일까. 이야기꾼들은 이야기에 진실성을 부과하기 위해 자꾸만 장치를 가져다가 심어둔다. 요즘에 와서는 그마저도 식상해졌는지 시작부터 대놓고 ‘이 이야기는 실화에 근거했음’을 말하고 시작한다.

너무 딸아이를 방치해두었나부다. 요새 심지어는 imaginary friend를 만들어서 혼자 떠들고 논다. 자기는 imaginary friend가 수십명이 있어서 심심할 일이 없다나? 혼자 침대에 누어서 한시간씩 조잘거리는 대상은 아마도 imaginary friend였나보다. 상상력이 바닥을 기는 나같은 아저씨는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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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에 이어서 발터 벤야민의 글 한구절을 공유한다.

책 읽는 아이 아이들이 학교도서관에서 책을 한 권씩 받는다. 저학년 아이들은 스스로 선택하지는 못하고 나누어주는 대로 받는다. 가끔씩만 자기가 원하는 책을 고를 수 있다. 자기가 탐하는 책들이 다른 아이들 수중에 들어가는 경우도 많다. 마침내 아이는 책을 받는다. 일주일 동안 전적으로 그 텍스트의 놀이에 탐닉한다. 텍스트는 눈송이들처럼 온화하고 은밀하게, 촘촘하고 끊임없이 아이를 감싼다. 그 눈송이들 속으로 아이는 무한한 신뢰를 갖고 걸어 들어간다. 거듭거듭 유혹하는 책의 고요함! 책의 내용은 전혀 중요하지 않다. 아직은 잠자리에 들면 스스로 이야기들을 지어내는 시절이니까. 거의 사라져 버린 그 이야기들 속에 나 있는 길들을 아이는 추적해간다. 책을 읽을 때 아이는 귀를 닫아둔다. 책은 너무 높은 책상 위에 있고, 언제나 한 손을 책 위에 올려놓는다. 아이는 형상과 메시지를 흩날리는 눈발 속에서도 볼 수있는 것처럼, 주인공의 모험들을 문자들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읽을 줄 안다. 아이의 숨결은 책 속에서 펼쳐지는 사건들 속에 있고, 온갖 등장인물들이 아이에게 입김을 분다. 아이는 어른보다 훨씬 더 가까이 인물들 속에 섞여 들어간다. 아이는 일어난 사건과 주고 받는 말들로부터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영향을 받는다. 자리에서 일어나면 아이는 마치 손으로 뒤덮인 것처럼 온몸이 방금 읽은 것으로 흠뻑 덮여 있다.(발터 벤야민, <일방통행로/사유이미지>, 길, 2007, 109-110쪽)

돈키호테와 산초 – 두려움에 대하여

두려워하는군, 산초야. 네 마음 속의 두려움이 네가 올바르게 듣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는 것이다. 두려움의 효력이 바로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고 사물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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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딸아이가 두려움을 호소할 때가 있다. 유난히 겁이 많은 편이라 눈앞에서 잠시만 부모가 없어도 난리가 난다. 어떻게 두려움을 대처해야 하는가 잘 가르쳐주고 싶다.

가장 편한 방법은 아빠가 항상 옆에 있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것이다. 효과적이지만, 일시적인 해법이다. 나는 그것이 지킬 수 없는 약속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평생 지켜주는 것은 불가능하다.

두려움은 대부분 우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만났을 때 생겨난다. 초자연적인 현상이나 갑작스런 놀래킴은 공포영화의 단골 소재이다. 나쁜일도 미리 예측이 가능하고, 대처가 가능하다면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내게 있어 가장 힘든 것은 나쁜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그 은근한 긴장감을 계속 유지하는 상태이다.

두려움에 대처하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을 것 같다. 과학의 방법과 종교의 방법. 무지의 영역을 지식의 영역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과학의 방법이고, 무지의 영역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종교의 방법일테다.

딸이 가장 배우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두려움의 영역을 짖밟고 부정하는 것이다. 두려움에 가득찬 사람들은 사물을 그대로 보지 못하며 사실을 사실 그대로 보지 못한다. 사람들이 상식적인 이야기를 못하는 것을 볼 때마다, 저 이는 무엇이 그렇게 두려운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발터 벤야민 글 발췌

셀프서비스 식당 “아우게이아스” – 발터 벤야민

“혼자서 식사를 한다는 것. 이것은 독신으로 사는 것에 대해 제기되는 가장 강력한 이의다. 혼자서 하는 식사는 삶을 힘겹고 거칠게 만들어버린다. 혼자서 식사하는 것에 익숙해진 사람은 영락하지 않기 위해 엄격하게 살아야 한다. 은둔자들은, 이것 때문만 인지는 모르겠지만, 검소한 식사를 했다. 음식은 더불어 먹어야 제격이다. 식사하는 것이 제대로 효과를 내기 위해서는 나누어 먹어야 한다. 누구와 나누어 먹는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예전에는 식탁에 함께 앉은 거지가 매 식사시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나누어 주는 것이었지 식사를 하면서 나누는 담소가 아니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음식을 나누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사교 또한 문제가 된다. 음식을 대접함으로써 사람들은 서로 평등해지고 그리고 연결된다. 생 제르망 백작은 진수성찬으로 차려진 식탁 앞에서 음식을 탐하지 않은 채 있을 수 있었고 이렇게 함으로써 이미 대화의 주인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각자 혼자서 식사를 하고 자리를 일어서는 곳에서는 경쟁의식이 싸움과 함께 일어나기 마련이다.”

+ 덧

어쩌다 벤야민이 눈에 들어와 글들을 퍼다 나르고 있다. 몇년쯤에 우리나라에서도 꽤 유행한 철학자로 알고 있는데 글이 매력적이다. 불친절한 글의 전개(논리의 흐름을 독자와 전부 공유하지 않는다.)가 그를 어려운 철학자 반열에 올려 놨나보다. 아니면 번역의 문제일 수도.

그의 글 만을 놓고 봤을 때는 영락없이 트위터/페이스북 글쓰기이다. 이건 페북 중독자가 셀프서비스 식당에서 혼자 밥먹다가 뜬금 없이 든 생각을 포스팅한 글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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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작가 – 발터 벤야민

“훌륭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점은 대단히 중요하다. 말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생각하기의 실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걸어간다는 것이 어떤 목표에 도달하고자 하는 소망의 표현인 것만이 아니라 그 소망의 실현인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 실현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즉 그 실현이 목표에 정확하게 합당한 실현이 되는지, 아니면 탐욕스럽고 흐리멍덩하게 소망에 자신을 탕진하는지는 길을 가고 있는 자의 훈련 여부에 달려 있다. 그가 자신을 절제하면서 불필요하거나 장황하거나 어슬렁거리는 동작들을 피하면 피할수록, 모든 신체의 자세는 자신에게 그만큼 더 족하게 되고, 그 신체를 더욱더 적절하게 운용하게 된다. 열악한 작가는 착상이 많이 떠올라 그 착상들 속에서 기력을 탕진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 열악한 작가는 자기가 생각하는 바를 냉철하게 말할 줄 모른다. 재기발랄하게 훈련받은 신체가 펼치는 연기를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사유에 부여하는 것이 바로 훌륭한 작가의 재능이다. 훌륭한 작가는 결코 자신이 생각했던 것 이상을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가 쓰는 글은 그 자신에게 도움을 주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에만 도움을 준다.”

Walter Benjamin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말과 글

말과 글은 그사람의 지적인 수준을 드러낸다. 5년 전인가 서울에서 지하철에 탔을 때 였다. 한 이쁘장하게 생긴 처자가 전화를 받는다. 그런데 그 처자가 대화를 이어가는 방식이 좀 신기했다. 그처자는 ‘대박’이라는 단어 만을 사용하여 대화를 하는 것이었다. ‘대박~’, ‘대~에~박’, ‘대!박!’. 아 하나 더 있다. ‘왠일이니?’

미국에 온지 얼마 안되는 사람들이 잘 쓰는 말이 있다. ‘Oh my God!’와 ‘you know’이다. 나도 처음에는 미국 사람스러운 감탄사를 적절하게 섟어주는 것이 영어를 잘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내다보니 이런 표현을 많이 사용하면 오히려 없어 보인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딸아이도 그랬고 나도 그렇고 언어를 처음 배우는 사람들의 특징이 있다. 슬랭이나 욕을 먼저 배운 다는 것이다. 그런 말을 쓰고 나면 네이티브에 가까워 진다는 느낌을 받는다. 내가 처음 우리말 욕을 배웠을 때 그런 느낌이 들었다. 왠지 표현을 속 시원하게 한 것 같았다. 자극적인 표현은 내 속에 진실함이 없기 때문에 생기는 것이다.

나는 꾸밈말도 같은 맥락이라고 생각한다. 적절한 꾸밈말(부사,형용사)은 더 정확한 이해를 가능하게 한다. 그러나 말을 할 때에 꾸밈말을 필요이상으로 사용하는 것은 표현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을 드러내는 일이다. 말의 기본 구조, 그러니까 주어, 동사, 목적어를 사용하고서도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어서 불필요한 단어를 덧붙이게 되는 것이다. 정확하고 논리적인 언어 사용을 노력하다 보면 불필요한 꾸밈 말이 본질을 흐린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는 딱딱 끊어지는 단문을 좋아한다. 이것은 어느 정도 취향의 문제이다. 말에서 곁가지를 다 치고 필요한 내용만 남기면 취할 것이 많지 않다. 마치 그림에서 비본질적인 요소를 다 제하고 나면 남는 것은 추상적인 몇개의 선인 것과 같다. 어떤이들은 장식적인 말과 장식적인 그림을 좋아하지만, 나는 본질만 남아 있는 것이 좋다. 그렇게 해서 듣는/읽는/보는 사람에게 생각할 여지를 남겨두는 것이다. 너무 말/표현이 과하면 부담스럽다. 쓰는/말하는/그리는 사람이 자신의 감정을 똑같이(!) 느끼라고 강요하는 것 같다.

사실 이렇게 말하는 나도 단문을 잘 쓰지 못하며, 과도한 표현을 할 때가 많다. 나의 문제는 한 문장에 너무 많은 생각을 집어 넣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또 글을 쓸때도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중구난방이 되곤 한다. 심지어는 과함에 대해 논하는 이 글을 쓰면서도 다듬어지지 않은 문장/생각을 사용하고 있어 민망하다. 그래서 글은 다듬어야 하고 계속 다듬을 수록 좋은 글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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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집을 읽고 있다. 카버 아저씨 작품의 미덕은 딱 필요한 그만큼만 말한다는 것이다. 레이먼드 카버는 하루키가 좋아하는 작가 중에 하나이다. 하루키는 꾸준히 카버의 책을 읽으면서 말의 리듬감과 호흡을 조절하는 감을 유지한다고 한다. 나는 하루키의 책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의 군더더기 없는 표현과 문장은 매력적이다. 문장에서 불필요한 부분을 빼고 나면 거기서 독자는 작가와 대화를 시작하게 된다.

그렇다고 너무 빼기에만 집중하면 논리가 흐트러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머리속에 모든 생각이 다 들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넘어가기가 쉽다. 그러나 논리의 고리 중 하나라도 빠진다면 그 글은 죽어버린다. 그래서 글을 잘 쓰기는 어렵다. 딱 필요한 만큼만 들어가고 빠져야 한다. 너무 과하면 부담스럽고, 너무 적으면 독자가 이해할 수 없다.

이러한 문제는 반복해서 글을 다듬으면 해결된다. 그러나 그 과정은 지나치게 고통스럽고, 지루하다. 그래서 프로페셔널 문장가들은 대부분 엉덩이로 글을 쓰는가 보다.

+ 덧: 이 글은 참고로 퇴고를 하지 않았다. 날 것 그대로의 생각을 적어봤는데, 나는 프로페셔널 작가가 아니니까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블로그만 하면 먹고사는데 지장이 있다.

민간인 – 김종삼

1947년 봄
심야
황해도 해주의 바다
이남과 이북의 경계선 용당포

사공은 조심조심 노를 저어가고 있었다.
울음을 터뜨린 한 영아를 삼킨 곳.
스무 몇 해나 지나서도 누구나 그 수심을 모른다.

김종삼 (1921-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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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은 기교 없이 본인이 겪은 사건을 담담히 묘사한다. 시를 읽는 사람은 그 상황을 머리속에 그리면서 더욱 깊은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진실된 언어 사용만이 이끌어 낼 수 있는 공감이다.

블랙 스완(나심 탈렙 저)을 읽는 中

요즘 블랙스완(나심 탈렙 저)을 재미있게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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듣던대로 금융을 가장한 인문학 책이다. 그가 말하는 학문과 학자들에 대한 독설은 왠지 통쾌한 면이 있다. 다양한 철학/수학/사상/역사 이야기가 나오는데, 논점이 명쾌하여 이해가 어렵지는 않다.

아직 1/3도 못 읽었는데 공감하는 내용이 많다. 몇가지 노트해 둔 내용을 공유한다. 그리고 원서로 읽고 있는데, 블로그 독자를 위해 내 나름대로 번역해 보았다. 참고로 내 번역은 의역이 심해서 거슬릴 수도 있다.

첫째

History is opaque. You see what comes out, not the script that produces events, the generator of history. There is a fundamental incompleteness in your grasp of such events, since you do not see what’s inside the box, how the mechanisms work. What I call the generator of historical events is different from the events themselves, much as the minds of the gods cannot be read just by witnessing their deeds. You are very likely to be fooled about their intentions. (The Black Swan, Nassim Taleb)

내맘대로 번역: 역사를 이해하기란 힘든일이다. 우리는 역사의 결과물을 알수는 있지만 역사를 만드는 근원을 볼 수는 없다. 역사라는 상자 속에  무엇이 있는지 볼 수 없고, 어떤 메커니즘이 작용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건을 이해하는 것은 언제나 미완성 작업일 수 밖에 없다. 내가 역사를 만드는 근원이라고 한 것은 역사적인 사건들 그 자체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사건의 현장에 있었다고 해서 운명의 신들의 마음을 읽을 수 없다. 우리는 운명의 장난에 쉽게 속아넘어간다. (블랙스완 중에서)

처음부터 잘 쓰지 그랬냐고? 아직 결말을 모르는데 어떻게 처음부터 잘 쓰나? 마찬가지다. 내 인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무슨 수로 처음부터 잘 살겠나? 소설을 쓰는 일은 ‘인생이라는 게 원래 뭐 그 따위’라는 사실을 깊이 이해하는 일로 시작한다는 말은 이런 뜻이다. 처음부터 잘 사는 사람은 누구나 없다. 그건 소설도 마찬가지다. 모든 이야기가 끝난 뒤에야 소설은 시작된다. (김연수, 소설가의 일)

나의 노트: 역사가 되었든 소설이 되었든 인생이 되었든, 그것은 다 사람의 일이다. 사람의 일이 쉽지 않은 것은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데에 있다. 다 살아보기 전에는 그 속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일을 돌이켜 보는 일이란, 왜곡이 심한 백미러(distorted rear-view mirror)를 보는 것과 같다. 지나간 일들은 하나의 관점으로 평가(assess)가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을 그대로 보여주지 않는다. 기억은 왜곡되기 마련이고, 그 관점과 일치하지(aligned) 않는 사건들은 생략되기 마련이다. 그렇다면 현재를 사는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 김중혁의 표현을 빌자면, ‘뭐라도 되겠지.’라면서 죽을 힘을 다해 살아가는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사람의 일이 불확실하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하지만, 재미있는 일이기도 하다.

둘째

Platonicity is what makes us think that we understand more than we actually do. (The Black Swan)

플라톤과 그의 추종자들의 방식은 우리가 실제로 아는 것보다 더 많이 알고 있다는 착각을 하게 만든다.

내맘대로 주석: 화이트헤드는 ‘모든 서양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 라고 했다. 내 맘대로 거칠게 표현하자면 현대의 학문은 실제를 이원화하고 쪼개고, 객관화 시켜서 이해하는 플라톤의 방법론에서 시작했다. 현대의 플라톤의 제자들은 모든 현상을 확률이나 이론으로 설명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이 만든 이론/사상은 black swan과 같은 기존의 이론으로 설명되지 않은 예기치 못한 사태가 왔을 때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요즘 읽는 또는 읽을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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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dral – Raymond Carver
카버 소설은 군더더기 없으면서 크게 여운을 남긴다. 단편이라 짬짬히 읽기도 좋음.

The Better Angel of Our Nature – Steven Pinker
20세기는 폭력의 역사였다는게 나의 통념이었는데, 그의 책은 그런 주장을 완전히 반박한다. 실증적인 자료들이 맘에 든다.

Essays – Ralph Waldo Emerson
미국에 살면서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잘살게 되었나 항상 궁금했다. 한 국가가 부강하게 되려면 그 나라가 말하는 가치가 보편타당한 설득력을 가질만큼 폭이 넓어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 에머슨은 ‘individualism’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미국적인 가치의 토대를 세운 사람이다. 근데 문제는 19세기 영어가 도대체 익숙치 않아 책이 진도가 안나간다는 거. 던져뒀다가 나중에 다시 도전해봐야 할 듯.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 Robert M. Pirsig
아들과 모터사이클 횡단 여행을 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엮은 철학/종교/사상/과학에 대한 이야기. 저자가 풀어 놓는 이야기들이 워낙 마음을 휘져어 놓는 바람에 감당을 못하고 잠시 쉬고 있는 중.

On Chesil Beach – Ian McEwan
쫀쫀하게 스토리를 짜는 장인 같은 소설가. 등장인물의 배경을 일일이 다 풀어 놓고, 장면 하나하나 생각의 단초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써내려가는데,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이다가 마지막에 몰아친다. 그러다보니 소설이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데, 문제는 스토리가 차곡차곡 쌓이는 그 부분을 넘어가려면 꽤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

Mindless Eating – Brian Wansink
미국와서 살이 너무 찌는 바람에 사게 된 책. 우리는 왜 생각 없이 먹는가. 식품업계는 어떻게 우리를 무의식 중에 더 먹게 만드는가를 다양한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근데 이 브라이언 아저씨가 너무 썰을 푸는 걸 좋아해서 책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다. 썰이 재미있긴 한데 non-native 입장에서 유머 코드가 따라가기 힘들 때가 좀 있다.

The Black Swan – Nassim Nicholas Taleb
Ian 아저씨의 디테일한 묘사랑 Brian 아저씨의 썰 풀기에 지쳐 있다가 며칠전에 집어든 책인데, Nassim 아저씨의 명료한 논리전개가 오히려 편하다. 게다가 그가 하는 이야기도 내가 평소 어렴풋이 생각하던거랑 일치해서 참 신나더라. 아무래두 이런 책이 나한테는 더 술술 읽히는 듯.

‘이언 매큐언’의 ‘체실 비치에서’를 읽으며

누구하고 약속한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번 이상은 포스팅을 해왔는데, 열흘 정도 블로그를 방치해두었다. 집에 3주간 손님이 머물렀고, 이번주는 친구가 다쳐서 이런저런 일을 도와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11월 들어서는 글쓰고, 그림 그리는 창작하는 쪽의 잉여질보다는 책을 읽고, 컴퓨터 게임하고, 영화를 보는 소비쪽의 잉여질에 열을 더 내고 있다. 몇년간 꽤 바쁘고 힘에 부치게 살았는데, 올해는 원없이 잉여질을 하며 산다. 아이도 조금 컸고, 미국에서 삶도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회사도 한국 생각하면 몹시 널널한 편… 이렇게 살아도 되나 싶다. 나란 인간이 게으르기 시작하면 한도 끝도 없기 때문에, 적당히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되야지 잉여질도 좀더 생산적이 될 텐데, 이건 그냥 소모적으로 내가 만든 세상에 침잠해 가는가 싶다.

10대 때는 소설을 꽤 좋아했는데, 한동안은 시간 낭비라는 생각이 들어서 보지 않았다. 살아가는 일은 소설보다 치열하고, 훨씬 더 다양한 관점과 진실을 보여주는데, 굳이 소설에서 무언가를 찾을 필요가 있을까. 문학은 때로 작가의 관점에서 일말의 진리를 보여주지만, 그것은 작가가 묘사하는 배경을 능동적으로 마음에 그려보고, 사건을 상상해보고, 그리고 인물에 자신을 투영해보는 일종의 과정을 거쳐야 이루어지기 때문에 어떻게 생각해도 시간 소모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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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전 가장 소모적인 일을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래서 고른 것이 사랑 이야기. 이언 매큐언(Ian McEwan)의 On Chesil Beach이다. 한국에도 체실비치에서 라는 제목으로 번역된 것으로 안다. 굳이 이언 매큐언을 고른 것은 영미 문학권에서 핫한 작가를 동시대를 사는 사람의 눈으로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한글책을 구해보는 건 돈도 시간도 아까우니 그냥 주위에서 구하기 쉬운 영어책을 보자는 귀차니즘도 있었고…

그래도 왜 사랑이야기일까? 사실 나도 잘 모르겠다. 한참 피가 끓던 나이에 남녀상열지사에 뜨거운 가슴을 품어본일이 없는 것은 아니나, 나는 항상 어설펐다. 게다가 30을 넘기고서는 사랑은 별 관심사가 아니다. 결혼하고서 좋았던 점 중 하나는, 이제 만나는 여자와 썸을 걱정할 필요가 없겠구나… 인 것도 있을 정도였다. 썸은 은근한 긴장감을 주고, 긴장감이란 대체로 기분 좋은 류의 긴장감이지만, 그 긴장감은 내가 좋아하는 편안함과는 반대기제이다.

어쨌든, 책얘기로 들어가서… 책에서 첫날밤에 대한 묘사는 구체적이다. (몸의 구석구석을 표현하는 명사, 신체접촉에 관련되는 동사를 사전에서 좀 찾아봐야했다.) 육체로 시작되는 감정의 파장. 그리고 엇갈리는 말들. 내가 20대 청년 일 때 읽었다면 이해할 수 없는 감정과 상황들이다.

작가는 사랑 이야기를 참 먹먹하게 하고 있다. 이야기는 잔잔하게 차곡차곡 쌓이다가 마지막 순간에 몰아친다. 결국 책장을 덮으면 진한 여운이 남는다. 플롯을 쫀쫀하게 짜는 것, 디테일한 묘사에서 작가의 꼼꼼함이 느껴진다.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작가의 대표작이라는 atonement도 한번 봐야 겠다.

구질구질하게 살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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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가을 피케티의 21세기 자본이 번역/출간되었다. 그는 돈이 돈을 버는 속도(r)가 경제 성장률(g)보다 빠르다고 이야기 했고, 잘사는 사람이 더 잘살게 될 뿐이라는 주장을 통계적/실증적으로 검증하려는 시도를 했다. 그가 던진 화두는 아주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아주 시의 적절해보인다.

나의 짧은 인생 경험으로 보건데, 있는 집 사람들은 대체로 착하다. 예의바르고 교양이 있다. 고등학교/대학교/대학원 시절에 만나본 있는 집 자제들은 대부분 그러했다. 세상에 찌든 느낌이 없다고 해야하나.

같은 맥락에서 사회지도층들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인간적으로 좋은 분일 가능성이 높다. 삼성에 일할 적에 먼발치에서 이재용씨를 본 적이 있다. 그는 예의바르고 교양있는 사람이었다. 듣기로는 정몽준씨도 개인적으로 만나면 유한 동네 아저씨라고 한다. (돈이 좀 있으신 동네 아저씨라서 그렇지…ㅎㅎ) 돈이 있으면 구질구질하게 살 필요가 없어지는 것일까?

구질구질하게 산다는건 무엇일까?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믿었던 젊은 시절. (크리스찬이니까 주안에서라는 단서를 달긴 했더랬다.) 그시절 나에게 구질구질하게 사는 것은 죄였다. 능력에 따라 보상받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내 미래는 내가 개척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세상이 어찌 그리 만만하기만 할까. 몇번 깨져보면 그래도 아쉬운건 몇푼 되지 않는 통장잔고, 한국에서의 학벌, 나이가 몇개인데 하는 자존심 같은 것이다. 남자라는게 어찌보면 한줌밖에 안되는 가진 것으로 호기 부리는 어린아이 같은 존재가 아닐까 싶다. 어른이 되면 그 방식이 조금 세련될 뿐이지…

쉽게 돈을 벌면 구질구질하지 않게 살 수 있을까? 쉽게 돈버는 일 치고 떳떳한 일이 없다. 남의 등쳐먹고 사는게 가장 쉽게 돈버는 일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감옥에 가 마땅한 일.

30대/40대가 되면 사회의 일원이 되고 책임을 지고 살아야하는 입장에 서게된다. 사람들이 큰 돈 때문에 구질구질하게 살까? 오히려 대부분은 작은 일 때문에 구질구질해진다. 회사에 몇년 더 있었다는 것, 나이 몇살 더 먹었다는 것, 갑의 위치에 있다는 것 등등… 뭐 조금이라도 있는 것을 움켜잡는 길이 구질구질하지만 편하게 살아가는 법이다. 누가 처음부터 구질구질하게 살고 싶겠냐마는 나이 먹고보면 별 수 없는게 사람인지라 젊은 시절의 활력은 모두 저만치 가버리고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고 싶어진다.

아버지가 생각난다. 우리 아버지는 아들을 구질구질하게 살게 하고 싶지 않으셨다. 딱히 넉넉한 적은 없이 살았던 우리가족. 그래도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해본 기억은 없다. 내가 중학교 다닐 즈음, 아버지께서 소득이 없어 고생하셨다. 그래도 부모님은 그것 때문에 내게 부담을 지우신 적은 없었고, 어떻게 가계가 굴러 갔던 것 같다. 내게 조금이라도 유한 부분이 있다면 아버지의 희생 때문이었으리라.

아직은 활력이 남아있는 30대 중반이다. 젊게 사는 것은 나의 아버지를 생각해서라도 해야만 할 일이다. 아버지는 아들이 구질구질하지 살지 않기를 바라며 젊음을 바치셨는데, 아들이 나이가 들었다고 구질구질하게 살아서는 안될 일이다.

내가 조금 구질구질하게 살다면, 그래서 재산이 조금 더 쌓인다면, 나의 자식은 구질구질하게 살지 않을 수 있을까? 조금의 도움이 될런지도… 그러나 그것은 나를 사랑하셨던 아버지에 대한 배반이고, 자식 앞에서 부끄러운 일이다.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편해지려고 한다면 나는 한없이 구질구질한 사람이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최근 읽은 ‘노인과 바다’의 한구절을 인용해보고자 한다.

“I told the boy I was a strange old man,” he said. “Now is when I must prove it.” The thousand times that he had proved it meant nothing. Now he was proving it again. Each time was a new time and he never thought about the past when he was doing it.

“내가 이상한 노인이라고 그 애한테도 말했지.” 그는 말했다. “이제 그걸 증명해 보일 때야.”과거에 이미 수천 번이나 증명해 보였다는 사실을 그에게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는 지금 이 순간 그걸 다시 증명해 보이려는 것이다. 언제나 매번 새로 처음 하는 일이었고, 그 일을 하고 있는 순간에는 과거를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해민3(解悶3)-두보(杜甫)

Dufu

(image source: wikipedia)

解悶 번민을 푼다-두보(杜甫)

一辭故國十經秋(일사고국십경추)
每見秋瓜憶故丘(매견추과억고구)
今日南湖采薇蕨(금일남호채미궐)
何人爲覓鄭瓜州(하인위멱정과주)

고국을 떠나 온지 십년을 지나
추과(참외) 볼적마다 그리운 고향
오늘도 남호에 뜯는 고사리
누가 나를 위하여 정과주를 찾으리

+ 애틀란타도 날씨가 제법 쌀쌀해졌다. 미국온지 4년째 인데, 한국은 작년 여름 일 시작하기 전에 잠깐 가봤던게 전부다. 내년에는 시간을 내서 잠깐이라도 한국 가봐야겠다.

++ 한시는 원문으로 읽어야 제맛일텐데, 한자에 약해서 아쉬움이 남는다. 한자는 중의적/함축적인 언어라서 번역에 따라 내용이 많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이 시는 전쟁통에 십년째 타향을 전전하던 두보가 고향의 명물인 추과(참외)를 보고 친구(정과주)의 빈집에서 쓰여졌다고 한다.

+++ 두보를 접하게 된건 ‘호우시절’이라는 영화를 통해서 였다. 배우들이나 배경도 좋았고 이쁜 사랑이야기도 좋았던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