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의 ‘대성당’ 중에서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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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ou probably need to eat something,” the baker said. “I hope you’ll eat some of my hot rolls. You have to eat and keep going. Eating is a small, good thing in a time like this,” he said.

‘A Small, Good Thing’ / Raymond Carver

“내가 만든 따뜻한 롤빵을 좀 드시지요. 뭘 좀 드시고 기운을 차리는 게 좋겠소. 이럴 때 뭘 좀 먹는 일은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은 될 거요.”

레이먼드 카버 /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도움이 되는’ / 단편집 ‘대성당’ 중

카버의 이 짧은 단편에는 부부가 등장한다.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고 실의에 빠진 부부는 빵집 주인의 전화를 받는다. 예전에 주문했던 죽은 아이의 생일 케익을 찾아 가라는 전화이다. 분노와 절망감에 부부는 빵집으로 달려간다. 발췌한 부분은 빵집 주인이 자초지종을 듣고 부부에게 건네는 말이다.

산사람은 살아야한다. 우리는 성찬식에서 빵을 나누고 예수를 기억하며 살아간다. 별것 아닌 것은 그렇게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지도 모른다. 가까운 사람을 잃은 기억이 있는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말이었으면 좋겠다.

고전은 우리에게 위안을 주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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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친구 중에 항상 고민하고 심각해하는 친구가 있었다. 나도 보통은 심각한 편에 속하지만 그렇게 고민까지 하는 편은 아닌지라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내면을 끝까지 파고 들었고 파고 들때마다 나오는 아픔으로 힘들어 했었다.

어쩌면 고전을 읽는 일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고전 소설을 예를 들어보자. 고전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은 대부분 단순하지 않다. 고전의 세계는 대부분 현실을 많이 닮아 있고 인물들도 입체적이다. 고전의 세계를 한번 통과하고 나서는 내가 가진 세계관이 한계를 가지고 있다는 진실을 보게 된다. 어떤 때는 진실과 대면하는 순간이 책을 통해 직접오지 않기도 한다. 그래도 묘하게 책을 읽는 중에 진실을 대면하는 때가 많이 있다. 그것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감수성이 커지면 그만큼 세상을 넓게 보게 되어 그런게 아닐까 싶다.

통속물, 소위 가벼운 책들은 그렇지 않다. 가벼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스테레오 타입에 가깝다. 머리쓸 필요 없이, 고민할 필요 없이, 그저 내가 좋아하는 환타지의 장르를 정해서 통속적인 세상에서 충분히 즐기다 오면 그만이다. 나를 깨고 흔드는 힘은 없다. 통속물은 내가 알고 있는 믿고 있는 세계관을 확실하게 해주고 나는 거기서 힘을 얻으면 그만이다.

고전이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가? 어떤 면에서 그러할 지도 모르겠다. 고전을 읽는 사람들은 소위 지혜라는 것에 좀더 가까운 사람이거나 깊이가 있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그렇지만 어떠한 면에서 고전을 읽는 사람들은 고통을 즐기기만 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한다. 고전은 우리를 한번 크게 두드려서 흔들어 놓고, 내가 알고 있는 틀을 깨고 나올 것을 종용한다. 문제는 그 틀을 깨어 나와 자유를 얻은 순간, 또 다른 고전이 기다리며 다른 틀을 보여 준다는 것이다. 고전을 읽는 행위는 끝도 없이 자기 정진을 하는, 시지프스처럼, 끝이 보이지 않는 고행의 길처럼 보인다.

어쩌면 고전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끊임없는 몸부림을 마치고 종국에는 내가 가진 것을 사랑하고 감사하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정도 아닐까 싶기도 하다. 마치 긴 여행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제자리를 찾게 되는 것처럼…

고전이 그다지 인기있는 시대는 아니다. 그러나 수없이 쏟아지는 지식의 홍수속에서 그 지식이 얼마의 생명력을 가지는가를 생각해보면 꽤 오랜 기간 살아남아 여러 사람의 인생을 바꾼 책들은 우리가 죽은 후에도 그 힘을 발휘할 것이다. 꼭 인기 있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니다.

고전이 힘을 잃은 시대에 아직도 그것을 붙들고 싸우는 분들에게 건투를 빈다. 그리고 즐거운 여행 되시기를 바란다.

My top 10 influential books

페친께서 저에게 영향을 끼친 10개의 책 릴레이의 바톤을 넘겨주셨네요.

딱히 독서 세계가 넓지도 않지만, 책이야기 하는 것 만큼은 좋아하기에 영향을 끼친 10개의 책을 선정해 봤습니다. 대단한 깊이가 있는 책도 아니고 그저 동시대를 살았으면 한번쯤 들어봤을 책들입니다. 포스팅 하면서 책에 얽힌 옛날의 추억들을 되새길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쓰다보니 늘어나서 10개의 책이라기 보다는 10개의 뭉터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워낙 이야기를 좋아하다보니 기억에 남는 책은 거의 소설이네요. 비소설도 분명히 꽤 읽었는데 말이죠.

참고로 이건 책추천도 아니고 불량식품 같은 책도 끼어있는 목록입니다. 그냥 제가 재미있게 읽은 책 이야기 정도랄까요? 주로는 유년기/청소년기에 읽은 책들입니다. 아무래도 자아 형성은 그 시기에 되지 않았을까 싶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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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웅진 세계 전래 동화 시리즈 (일본 전래동화, 아코마 인디언, 호피 인디언 전래동화 등등)

유치원 시절, 어머니가 잠시 책 외판일을 하셔서 우리집에는 세계 전래 동화 시리즈 전집이 있었다. 집에서 딩굴거리며 책읽기만 좋아했던 나는 어렸을 때 인디언 전래동화의 환상적인 세계와 일본 전래동화의 기묘한 이야기 같은 것을 읽으면서 상상하는 것이 주된 놀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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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아가사 크리스티)

내 또래의 중고딩들이 그렇듯이 나는 추리소설에 심취해 있었다. 사촌형 집에 홈즈(아서 코난도일) / 뤼팡 (모리스 르블랑) 전집이 있었는데 거기 놀러가서 하나씩 빌려서 읽는게 삶의 낙이 었다. 그러나 그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책은 아가사 크리스티의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그 서늘한 공포는 나를 한동안 사로잡았다. 수십번은 읽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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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타임머신 (H. G. 웰스)

내가 탐닉했던 장르 중에 하나는 SF다. 고딩 때 한동안은 매일 서점에 들러 SF 코너에서 신간 리스트를 보던게 주된 낙이었다. 필립 K 딕 단편들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 두번째변종 등)이나 아이작 아시모프의 작품들도 인상 깊었지만 아무래도 좀더 고전적인 <타임머신>이 나를 오랜 기간 사로잡았었다. 최근에 기회가 되어 다시 읽어 보았는데, 자본주의와 인류의 미래에 대한 다양한 상징이 닮긴 수작이었다. 만화까지 포함하자면 고3 때 ‘총몽’에 빠져서 사이버 펑크 세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던 기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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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개미 (베르나르 베르베르), 쥬라기 공원 (마이클 클라이튼)

두 책을 함께 묶은 이유는 세상에는 내가 알 수 없는 무지의 영역이 있다는 것을 알게 해준 책들이기 때문이다. <개미>는 철저히 개미의 관점에서 그려진 세계이다. 그것은 3차원이 아닌 2차원/1차원의 세계이다. 인간이 인지 할 수 있는 세계가 3차원이라면 그 이상의 차원은 우리가 인지하는데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유클리드 기하학의 세계에서는 비유클리드 기하학을 이해할 수 없다. 과학과 현대 문명에 한계가 있음을 얄팍하게 나마 느꼈다.

<쥬라기 공원>은 영화 덕분에 액션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 소설이 소개하는 카오스 이론에 꽂혔었다. Chapter 마다 묘한 그림의 일부를 보여주면서 예상치 못한 큰그림을 보여 주었던 것이 신선했다. 그리고 어설프게나마 복잡계에 대한 개념을 접했었다. 속편에서는 퍼지 이론에 대해서 소개했는데 그것은 1편보다 신선함이 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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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은하영웅전설 (다나카 요시키)

고등학교 시절 영웅 이야기에 빠져 보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나도 그 중에 하나 였다. 그리스의 영웅들 (플루타크 영웅전), 삼국시대 중국의 영웅들 (삼국지), 무협세계의 영웅들 (김용의 사조 삼부작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 도 모두 나의 영웅들이었지만 아무래도 은영전의 라인하르트와 양 웬리를 뛰어 넘지는 못할 것 같다. 지금 읽으라고 하면 다분히 중2병스러운 인물 묘사를 견디지 못할 듯 싶지만, 그당시 나에게 너무나도 멋있던 그들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은 아니지만 같은 맥락에서 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도 재미있게 보았다. (역사라기 보다는 소설로서…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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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동주 열국지 (민음사 판)

이문열 역 민음사 삼국지 10권을 세번 정도 읽고서 내 눈에 들어왔던 것은 서유기와 열국지였다. 열국지는 당시 10권으로 민음사에서 나왔는데 12권으로 최근 다시 증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이야기는 주로 춘추전국시대의 제자 백가 이야기. 전국의 군웅들이 패권을 다투는 춘추전국시대를 거쳐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기까지, 약 800년간 벌어진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다. 이 책을 다 읽고서 초한지까지 읽었었다. 한번 빠지면 디비 파는 내 성향으로 맹자와 장자까지 손을 뻗쳤긴 했다. 물론 고딩인 내가 내용은 거의 이해하지 못했지만… 장자의 기묘한 이야기는 그래도 재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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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세계사 편력 (네루)

소설을 말고 내가 좋아했던 건 역사였다. 역사 또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그러했을 지 모르겠다. 네루의 세계사 편력은 나에게 균형잡힌 역사관을 심어준 책. 영웅 중심의 역사에 심취해 있던 나에게 사람들의 이야기가 역사라는 것을 알게 해준 책이다. 비교적 최근에 읽은 책 중에서는 한국 근대사를 다룬 <우리역사 최전선> (허동현, 박노자)를 재미있게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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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장미의 이름 (움베르트 에코)

너무나도 매력적인 이책을 만난건 도서 대여점이었다. 방학때 시간 때우기로 빌린 이 책은 단숨에 나를 사로잡아서 이틀동안 밥도 먹는둥 마는둥하면서 책만 읽었다. 책 곳곳에 가득한 기호학/신학/중세의 모습이란… 그러한 풍부한 이야기를 추리소설의 형식으로 단숨에 읽게 만든 저자의 재능/노력은 나의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다. 지금도 표지를 보면 설레는 그런 책. 여담으로 당시 묘사했던 중세의 도서관의 모습을 스위스 장트갈렌의 고성당에서 발견해서 너무나도 흥분했던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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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하나님을 아는 지식 (제임스 패커)

장미의 이름이 소설적인 재미로 나를 흥분하게 했다면 신앙적으로 나를 흥분하게 만든 책은 제임스 패커의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다.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차분하게 논리 정연하게 서술한 이 책은 나의 신앙의 큰 기둥이 된 책이었다. 대학 시절 나의 주된 독서의 영역은 신앙에 관한 책이 었는데,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간증이나 사례집도 많이 읽었지만 시간이 흐르고 보니 좀더 단단한 근본에 대해 이야기 하는 책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지금도 생각나는 책들로는 마틴 로이드 존스 ‘복음의 핵심’, 유진 피터슨 ‘다윗, 현실에 뿌리박힌 영성’, IVP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학생운동’ 이다. 한때 로이드 존스에 심취해 있었는데, 런던에 갔을 때 흠모하는 마음으로 웨스트 민스터 채플에 방문해서 주일 예배를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교회 분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로이드 존스 목사님을 흠모한다고 하니 교인분께서 설교가 타이핑되어 있는 당시의 주보를 원본으로 몇부 주셨고, 책을 한권 주셨는데 그 때 받았던 책이 ‘복음주의와 복음주의 학생운동’이다. 복음주의 운동을 잘 정리한 좋은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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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창세기 (구약 성경)

성경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책은 창세기 이다. 항상 성경 통독을 시작할 때마다 처음 만나는 책이라서 가장 익숙하지만, 사실은 이야기 이기 때문에 나에게 항상 매혹적으로 다가오는 책이다. 굳이 두번째를 꼽는다면 바울의 ‘빌립보서’ 바울의 케노시스의 신학이 잘 나타나 있고, 통달한 도인 같은 자기 비움의 삶의 모습이 그대로 나와 있는 책이다. 빌립보서는 참으로 사람을 평안하게 하는 책이다.

* 그외

내 인생의 책을 꼽으라면 어찌 이것 뿐이겠는가. 10개로 압축해서 이렇게 써봤는데, 그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책을 나열해 보고자 한다.

키노 (영화잡지), 몬스터(만화) (우라사와 나오키), 먼나라 이웃나라 (이원복), 대지 (펄벅), 톨스토이 단편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사람에게는 얼마만큼의 땅이 필요한가? 등등),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마거릿 미첼), 순전한 기독교(C S 루이스),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나무를 심은 사람 (장지오노), 괴짜 경제학 (스티븐 레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유홍준), 파인만씨 농담도 잘하시네 (리차드 파인만), 학문의 즐거움(히로나카 헤이스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로버트 피어시그)

먼 후일 /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 잊고
먼 훗날 그 때에 “잊었노라”

<개벽>(1922.8) 수록

+ 덧

너무나도 그리워서 잊고, 믿을 수 없어서 잊는 소월의 당신은 누구/무엇이었을까. 시대가 10대 후반의 시인을 이렇게 청승맞게 만들었을까.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고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는 무언가에 대해 이렇게 절절하게 표현해 내는 시가 또 있을까 싶다.

책읽는 中: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 (Chapter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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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고 있는 책이 있다. 로버트 피어시그의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이다. 1974년 출간되어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철학책으로 알려진 이책은 한국에는 몇년전에 ‘선(禪)과 모터사이클 관리술-가치에 대한 탐구‘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된 것으로 알고 있다. 11살 아들과 17일간 모터사이클 횡단 여행을 한 이야기인 이책은 기본적으로 여행기의 형식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은 문학/종교를 아우르는 방대한 철학적 탐험기이다. 이 책을 잡고서 읽다가 문득 문득 드는 생각들을 포스팅 해봐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Chapter 2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주인공은 모터사이클에 문제가 생겨 정비를 받는다. 정비공은 무심한 태도로 여기저기를 살피다가 해머와 정(cold chisel)으로 냉각기를 두둘겨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다. 주인공은 무언가 잘못된 느낌을 받고서 정비를 중단하고 모터사이클을 가지고 정비소를 나온다. 나중에 본인이 천천히 정비를 하면서 결국 문제를 찾아 낸다.

여기서부터는 몇자를 그대로 옮기고 싶은데, 내게 한글 번역본이 없는 관계로 직접 번역하여 옮긴다. 심각한 정도로 의역을 했고 내가 이해한대로의 재구성이다. ㅎㅎ

우리는 모두 구경꾼들이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것’에 대해 별 고민이 없거나, ‘그것에 대해 생각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고 한다. 20세기가 왜 이렇게 잘못가고 있는가? 이번 여행에서 우리는 이 질문을 품고서 ‘사람과 사람이 하는 일에 대한 단절(separation)’에 대해 조금씩 살펴보려고 한다. 서두르지 않겠다. 서두르는 것은 20세기의 독이다. 우리는 서두르는 동시에 사려깊을 수 없다. 나는 느리지만 사려깊게 그리고 꼼꼼히 살펴볼 것이다. 내가 시어핀(sheared pin: 위에서 말한 모터사이클 고장의 원인)을 찾았던 그 태도(attitude)로 말이다. 내가 시어핀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그 태도 때문이었다.

We were all spectators. Caring about what you are doing is considered either unimportant or taken for granted. On this trip I think we should notice it, explore it a little, to see if in that strange separation of what man is from what man does we may have some clues as to what the hell has gone wrong in this twentieth century. I don’t want to hurry it. That itself is a poisonous twentieth-century attitude. When you want to hurry something, that means you no longer care about it and want to get on to other things. I just want to get at it slowly, but carefully and thoroughly, with the same attitude I remember was present just before I found that sheared pin. It was that attitude that found it, nothing else.

모터사이클은 현대의 물질 문명과 기술을 상징한다. 사실 내가 슬쩍 건너 띤 chapter 1에서 저자는 기술로부터 도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삶에 대해 말을 했다. 이제 chapter 2에 와서는 생각하지 않고 기술(현대 문명)을 받아 들일 때 그것은 우리를 망친다고 말을 하고 있다. 주체와 객체를 띄어내고 구경꾼이 된다면 우리는 폭력적이 되어 질 수 밖에 없다.

이야기가 너무 철학적이고 사변적이 되어간다. 원래 책의 화두가 그렇긴 하다. 이왕 이야기를 이렇게 끌고 간 김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가 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Eichmann in Jerusalem)’ 이야기를 조금 더 해보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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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http://www.real-debt-elimination.com/real_freedom/Propaganda/holocaust/eichmann_trial.htm)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 계획 실무를 책임졌던 인물인데, 도피 생활 끝에 1960년 아르헨티나에서 체포된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었던 것은 생각과 달리 아이히만은 악마적인 인물이라기 보다는 친절하고 선량한 사람이었다는 데에 있었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대학살을 할 수 있었을까? 재판 과정을 지켜본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말로 결론을 내린다.
그리고 아이히만에 대해 이렇게 평을 한다. ‘다른 사람의 처지를 생각할 줄 모르는 생각의 무능은 말하기의 무능을 낳고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아이히만의 죄는 ‘생각하지 않은 것(thoughtlessness)’이다. 우리가 생각하지 않을 때, 그저 메뉴얼 대로 따르는 삶을 살 때 우리는 문명의 모습을 한 괴물이 되고 만다.
최근 우리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이야기를 한마디만 덧붙이려고 한다. 내가 이야기 하려고 하는 것은 사건 그 자체이다. (주: 다만 지금 뉴스에 나오고 사람들이 싸우고 있는 것은 사건 그 자체가 아니다. 이것은 사건 이후의 장례식에 대한 논의이다. 이 사건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지 장례식을 반년 정도 끌고 가고 있다. 장례식은 남겨진 사람들을 위로하는 자리일 터인데 누구도 위로를 받지 못하고 아무도 이 장례식을 끝내려고 하지 않는다.) 세월호 참사의 직접적/간접적 가해자 모두는 이러한 평범한 일반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이 보통 사람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메뉴얼 대로 따랐을 뿐이다. 심지어 몇몇은 그 메뉴얼마저도 무시하고 생각을 하기를 멈추고 살고 있었다. 우리는 그 얼굴을 선장에게서, 소유주에게서, 관료들에게서 보았다. 어쩌면 이미 세계가 너무나 커질 대로 커져서 그 속에 부품으로 살아가는 우리는 생각하는 능력을 잊고서… 그리고 공감하는 능력을 잃고서… 살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 얼굴과 무심함을 바로 내 자신에게서 발견할 때 그때가 가장 섬뜩하고 무섭다. 그 핑계는 다양하다. 효율적이 되려고, 바쁘니까, 모두들 그렇게 하니까… 등등. 표정없이 살지 말자, 생각하며 살자, 괴물이 되지 말자고 다짐해본다.

백면서생(白面書生): 오직 글만 읽고 세상 일에 경험이 없는 사람을 이르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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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년전 유행한 유머중에 하나가 ‘연애를 글로 배웠습니다.’ ‘키스를 글로 배웠습니다.’이다. 나는 그러한 유머를 볼 때마다 배꼽을 붙잡고 웃는다. 내가 그 유머에 자지러지는 이유는 왠지 모르게 내모습을 보는 것 같아서이다.

나는 새로운 경험에 항상 목말라 있었고, 그 갈증을 해결했던 방법은 주로 책을 통한 간접경험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매료 시켰던 것은 주로 역사이야기, 세계 전래 동화, 각국의 신화, 성경이야기, 탐정소설, SF 소설 같은 것들이다. 딱히 분야가 정해져 있던 것 같지는 않고 잡식을 했는데 한가지 공통되는 점은 이야기라는 것이다.

소설은 우리의 삶을 묘사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주 일부분일 뿐이다. 대부분의 인기 있는 통속소설이라는 것은 인기가 있을 법한 소재와 인물을 사람들의 판타지와 적당히 버무려서 만들어진다. 그렇다고 단순히 재미 있는 소재만을 가져온다고 해서 소설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아무리 허접한 소설이라 하더라도 작가는 소설 속에서 세계를 창조하는데, 이때 작가의 세계관이 들어가게 된다.

예를 들어 미국 히어로물의 세계관이라고 하면 슈퍼맨/배트맨이 등장하여 초인적인 힘으로 세계를 구하지만 괴로워하거나 정체성을 찾는 이야기이다. 섹스 앤 더 시티의 세계관이라 하면 뉴욕에 사는 매력적인 직장여성들이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우정을 나누기도 하면서 즐기는 삶을 사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세계관은 소설속에만 존재하는 법칙 같은 것인데 우리가 대부분 어떤 이야기가 마음에 안들거나 싫어지는 이유는 세계관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떤이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불행하게 생을 마치는 식의 세계관이 탐탁치 않고, 어떤이는 모두가 행복하게 끝나는 이야기가 너무 현실과 동떨어진다며 지루해 한다. 우리는 보통 자신의 세계관과 맞아 있는 이야기를 좋아한다.

세계관이라는 것은 우리가 세상을 보는 시야에도 영향을 끼치는데, 세상 경험이 별로 없는 사람은 영화와 소설 속의 세상을 실제와 혼동할 때가 있다. 세상이 작동하는 방식은 소설과 다르다. 만약 뉴욕에 한번도 와보지 못한 사람이 섹스 앤 더 시티나 프렌즈가 그리는 뉴욕이 정말이라고 생각하고 똑같이 살려고 한다면 누가 봐도 이상한 행동을 하게 될 것이다. 그런 행동은 코메디의 소재로 적합하다. 연애에 있어서도 그러한데, 무협소설이나 연애소설에 나오는 것을 현실로 생각하고 연인에게 행동한다면 가장 빵점인 연애를 하게 될 것이다.

나에게는 영화/소설/공연예술에 목을 메던 시절이 있었다. 어렸을 때 특히 그러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이야기라는 것이 별로 의미 없게 여겨지는 순간이 왔다. 어떤 이야기는 너무 얄팍하며, 어떤 이야기는 너무 현실과 동떨어져 있다. 어떤 소설은 그저그런 세계관을 독특한 문체만으로 잔뜩 치장했을 뿐이다. 너무 뻔하다. 내가 알고 느끼는 세계와 작가들이 그리는 세계가 충돌하는 그 지점에서 나는 소설읽기를 멈추었다. 소설보다는 자기계발서를… 영화보다는 예능프로를… 즐겨보던 시절이었다. 대부분의 책은 (저자가 다른 경우에도!) 그저 동어 반복일 경우가 많다.

이제 책하고 화해를 할까 싶다. 검증된 고전의 경우에는 조금 살아봐야 알 수 있는 지혜 같은 것이 있다. 10대에 읽었던 ‘노인과 바다’는 그저 낚시꾼의 허무한 귀환 정도의 재미없는 글이었다. 조금 나이가 들어 만나는 헤밍웨이는 자연의 위대함, 인간의 의지를 찬양하는 작가이다. 어린시절 톨스토이의 단편은 그저 재미있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을 뿐이다. 한번 종교/삶과 씨름을 해본 후에 만나는 톨스토이는 소박한 이야기에 닮긴 경건함이다.

여전히 사람과 관계 맺기에 미숙한 한 백면서생의 이야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