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읽는 또는 읽을 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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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hedral – Raymond Carver
카버 소설은 군더더기 없으면서 크게 여운을 남긴다. 단편이라 짬짬히 읽기도 좋음.

The Better Angel of Our Nature – Steven Pinker
20세기는 폭력의 역사였다는게 나의 통념이었는데, 그의 책은 그런 주장을 완전히 반박한다. 실증적인 자료들이 맘에 든다.

Essays – Ralph Waldo Emerson
미국에 살면서 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잘살게 되었나 항상 궁금했다. 한 국가가 부강하게 되려면 그 나라가 말하는 가치가 보편타당한 설득력을 가질만큼 폭이 넓어야 한다는게 나의 생각. 에머슨은 ‘individualism’이라는 말이 생기기 전부터 미국적인 가치의 토대를 세운 사람이다. 근데 문제는 19세기 영어가 도대체 익숙치 않아 책이 진도가 안나간다는 거. 던져뒀다가 나중에 다시 도전해봐야 할 듯.

Zen and the Art of Motorcycle Maintenance – Robert M. Pirsig
아들과 모터사이클 횡단 여행을 하면서 나눈 이야기들을 엮은 철학/종교/사상/과학에 대한 이야기. 저자가 풀어 놓는 이야기들이 워낙 마음을 휘져어 놓는 바람에 감당을 못하고 잠시 쉬고 있는 중.

On Chesil Beach – Ian McEwan
쫀쫀하게 스토리를 짜는 장인 같은 소설가. 등장인물의 배경을 일일이 다 풀어 놓고, 장면 하나하나 생각의 단초 하나하나를 꼼꼼하게 써내려가는데,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이다가 마지막에 몰아친다. 그러다보니 소설이 고풍스러운 느낌이 드는데, 문제는 스토리가 차곡차곡 쌓이는 그 부분을 넘어가려면 꽤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것.

Mindless Eating – Brian Wansink
미국와서 살이 너무 찌는 바람에 사게 된 책. 우리는 왜 생각 없이 먹는가. 식품업계는 어떻게 우리를 무의식 중에 더 먹게 만드는가를 다양한 실험을 통해 보여준다. 근데 이 브라이언 아저씨가 너무 썰을 푸는 걸 좋아해서 책에 온전히 집중하기 힘들다. 썰이 재미있긴 한데 non-native 입장에서 유머 코드가 따라가기 힘들 때가 좀 있다.

The Black Swan – Nassim Nicholas Taleb
Ian 아저씨의 디테일한 묘사랑 Brian 아저씨의 썰 풀기에 지쳐 있다가 며칠전에 집어든 책인데, Nassim 아저씨의 명료한 논리전개가 오히려 편하다. 게다가 그가 하는 이야기도 내가 평소 어렴풋이 생각하던거랑 일치해서 참 신나더라. 아무래두 이런 책이 나한테는 더 술술 읽히는 듯.

일곱살 딸에게 시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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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media)

딸애는 어려서부터 잠이 없었다. 갓난쟁이 때는 바시락 소리만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울어댔다. 크면서도 뭐가 그리 무서운지 자다 말고 깨서 무섭다고 난리다. 만 세살이 되어서야 자다가 깨는 일 없이 한밤을 그대로 자기 시작했다. 건강에 이상이라도 오는게 아닐까 싶어 의사에게 물었더니 잘 크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했다.

세상에 궁금한 것 투성이라 자는 시간도 아까운가부다. 아이 때 낮잠이라도 재울라 치면, 잠깐 눕는 듯 하다가 밖이 궁금해 못참는다. 만으로 두살 반 되던 때에 낮잠을 재우는 걸 포기했다. 가능하면 9시 이전에 재우려고 일정한 시간에 침대에 눕히는데, 하루종일 있던 일을 되새기느라 잠이 들려면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 혼잣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깔깔 웃기도 하고, 아빠를 호출하기도 한다.

9시 45분 경. 무섭다며 침대에 누어서 아빠를 호출한다. 무슨 일인가 가봤더니 잠깐 도란도란 시간을 갖자고 한다. “아빠,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음… 있잖아 5분이 한 몇 초만에 지나는 것 같아.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시간이 훅 지나는 게 너무 아쉬워.”

아이구 이놈아 일곱살 아이에게 시간이 그렇게 빨리가면 엄마 아빠는 어쩌란 말이냐.

간만에 그려본 아크릴화

Painted my friend performing a fire dance at a small town, Germany. (Acrylic, 02/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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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을 그려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붓을 잡았는데, 꽤 고생했다. 뎃생만 몇달 하다가 간만에 그림에 손을 대서 였다. 디테일에 집착해서, 큰 붓으로 붓터치를 하기 보다는 작은 붓으로 연필뎃생 하듯이 그림을 그리는 거였다.

불만스러운 부분이 몇군데 있지만, 그리면서 또 배웠으니 이정도로 만족. 꽤 오래 작업한 그림이라 완성한 기념으로 올려본다.

원래는 공연을 한 나타샤에게 선물할 생각도 있었으나, 아쉬운 부분이 있어서 고민중이다. 독일까지 보내려면 돈도 들 것 같구…

두가지 언어 사용이 만드는 번역체 말투들 – 우리집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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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두 나는 영어와 한국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과 한집에서 살다보니, 소위 말하는 번역체 말투를 생활 속에서 가끔 본다. 영어로 생각한 단어를 한국말에 대응하는 단어로 말하다 보니 생기는 어색한 경우. and vice versa (또는 그 반대 경우.)

1. 우리 아내

신혼 때, 아내는 설겆이를 하고 나서 그릇을 꼭 말려두라고 당부하곤 했다. 나는 착한 남편이니까 아내가 말한대로 했다. 우리 집에는 식기 건조기가 따로 없기 때문에 그릇을 말려두려고 찬장에 순서대로 줄을 맞추어 뒤짚어 엎어두었다. 물기가 빠지면 그대로 마르겠지.

이상한 낌새를 챈 아내가 내게 다시 이야기 한다. “그릇을 말려 두라고 하지 않았나? 왜 그냥 둬?” “말한 대로 말리고 있어.” “페이퍼 타월로 말렸어?” “아니.” 그제서야 나는 아내가 말리라고 하는 의미를 깨달았다. 영어로 ‘dry’는 자연적으로 말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물기를 닦아낸다는 의미도 있다.

우리 마눌님은 지금도 ‘dry’를 그대로 한국말로 옮겨서 ‘말린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닦기 보다는 젖은 채로 뒤집어 놓는다. 지금은 못알아 들어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이다.

2. 딸내미 사례 1

우리는 미국에 살기 때문에 딸애에게 영어를 따로 가르치지 않는다. 유치원에서 선생님이나 친구 사이에서 자연스레 배우는 걸로 충분하다. 우리 걱정은 사실 아이가 한국어를 잊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미 한국 보다 미국에서 산 시간이 더 길었는데, 당연한 거다.

그래도 가끔은 영어의 뉘앙스는 가르쳐야 겠다는 생각이 든다. 잘못된 언어 사용으로 오해를 사는 일이 생길 수도 있어서 이다.

재작년 아이가 다섯살 때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이다. 아이가 놀이터에 나가면서 신발을 신어야 했다. 그런데 신발이 스스로 신기에는 조금 어려웠던 모양이다. 한쪽을 간신히 신어보다 잘 안되서, 선생님에게 도와달라고 했다고 한다.

근데 우리는 아이에게 어떻게 영어로 공손히 말하는지 가르친 적이 없다. 아마도 때쓰는 뉘앙스로 선생님에게 명령조로 말했던 것 같다. (영어로 공손하게 말하는 것이래봐야 별건 없고, ‘Could you~?’ 나 ‘Please’를 붙여서 말하는 정도이다.) 그래서 선생님은 아이에게 공손하게 말하는 법을 가르치기 위해 ‘please’라고 말해야 신을 신겨줄 것이라고 했단다. 아이는 ‘please’라는 말을 처음 들어봤기 때문에 괜히 토라져 버렸다. 아무말도 없이 선생님과 신경전을 벌이다가 결국 한쪽만 신발을 신고서 놀이터에서 놀았단다. (우리 딸이 은근 자존심이 강하다.)

딱히 대단한 일은 아닐 수 있지만, 조심은 해야 겠다 싶었다. 아이 엄마가 선생님께 상황 설명을 했다. 아이에게는 부탁을 할 때는 ‘please’라고 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쳤다.

그담부터 딸아이는 ‘please’라는 말을 참 잘한다. 근데 너무 잘하다 보니까 한국말을 할 때도 말 끝마다 ‘제발’을 붙인다는 게 문제다. 아마도 아빠한테 공손하게 말하느라고 ‘please’에 해당하는 ‘제발’을 붙이는 것 같은데, 나한테는 조르는 말처럼 들려서 거슬릴 때가 있다.

3. 딸내미 사례 2

작년 가을에 한국에서 친구 가족이 우리집에 와서 머무른 적이 있다. 그 집 아들이 우리 딸보다 한살이 많은데 같이 잘 논다. 딸애는 오기도 전에 벌써 신이 났다. 유치원에서도 선생님한테 한국에서 오빠가 온다고 몇번을 자랑한 듯 하다.

선생님이 하루는 궁금해 하며 묻는다. 딸아이가 한국에서 ‘brother’가 온다고 몇번을 말했다고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선생님 생각에는 ‘친오빠’는 아닌 것 같은데 누가 오느냐고 묻는다.

영어로는 ‘brother’라고 하면 ‘친오빠’를 말하고 이 경우에는 ‘friend’라고 하는게 더 맞았을 터. 우리 말을 굳이 영어로 옮기니까 이상하게 되어 버렸다.

4. 내 경우

언어 능력이 월등하게 뛰어나신 우리 마눌님이나 딸아이하고 내가 비교할 수준이나 되겠나. 사실 나는 번역체를 논할 정도도 못된다. 시간이 흘러도 영어는 안늘고, 한국말은 자꾸 까먹는다.

그래도 생각해보니, 영어로 문장을 쓰면서 우리말로 글쓰는 스타일도 조금 바뀌긴 했다. 이를 테면 문장이 길어질 때 쉼표를 많이 사용한다. 우리 말은 글을 쓸 때 쉼표를 많이 사용하지 않는데, 영어는 잘 끊어줘야 효과적인 의사 표현이 가능하다. 원래는 단문이 의사표현에 효과적인데, 내가 단문을 잘 못 쓴다. 절충안으로 쉼표를 무지하게 쓴다.

또 하나는 요새 한국말 할 때 무의식 중에 내가 단수/복수를 제대로 쓰고 있나 점검한다는 것이다. 우리말은 단/복수가 분명하지 않은데 그걸 분명하지 않게 말하니까 뭔가 덜 말한 찜찜한 기분이 든다. 그렇다고 영어를 할 때 수일치를 제대로 하는 건 아니다. 역시 영어는 안늘었는데 한국말만 이상해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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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음/관사/전치사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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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와 발음 – Atlanta, fantastic, coyote

온라인에서 나를 얼마나 드러내는 것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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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깅을 하다가 가끔 드는 고민이 있다. 나를 어디까지 드러내야 하고, 어디까지 감추는 것이 좋을까. 내가 유명한 블로거이거나 감추어야 할 은밀한 사생활이 있어서는 아니다. 내 글의 독자들이래야 친구/가족들이 대부분일 테다. 하지만 블로그는 오픈된 공간이다. 이곳도 검색유입이 꽤 있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나를 드러내는 것은 쉽지 않는 문제이다.

그런데 과연 모르는 사람이라서 자신을 드러내는게 어려운 것일까. 블로깅을 하면서 간혹 선뜻한 느낌이 들 때가 있는데, 내가 블로그를 하는 것을 아는 지인과 만날 때이다. 친구나 가족들이라 할지라도 항상 속 깊은 대화를 나누는 것도 아니고, 어느 정도는 내면을 조금 감추고 사는게 사람이다. 블로깅을 통해 일방적으로 나를 드러내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일이다.

나는 독자들을 잘 모르는데, 독자들은 나의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주된 관심사라든지, 정치적인 지향점이라든지, 좋아하는 책이라든지, 최근에 본 영화라든지, 딸과의 관계는 어떠한지… 하는 것들을 말이다.

교류 없이 지내던 옛친구를 블로그를 통해서 만나고, 오프라인 모임까지 연결되는 장면을 상상해 보았다. 소개팅에 나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나는 상대에 대해 아무 정보가 없다. 외모도 배경도 모른채 그저 커피점에서 상대방이 언제 오려나 궁금해하면서 커피를 마신다. 근대 상대는 이미 나에 대한 뒷조사가 끝난거다. 창밖에서 나를 지켜보면서 언제 들어갈지 뜸을 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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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런 생각은 오버인지도 모르겠다. 사람들은 대부분 남의 일에 관심이 없다. 예를 들어 사촌 동생 결혼식장에서 갔는데 오랜만에 집안 어르신을 만났다고 하자. 어르신은 관심있는 척, 나에 대해 몇가지를 물어본다. 나는 성의껏 대답을 하지만, 어르신은 그 내용을 금새 잊는다. 거기다가 만약 내가 진짜 요즘 어떻게 사는지에 대한 이야기 – 이를테면, 딸과 대화하면서 세상은 그래도 살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던지, 회사에서 하루 종일 치이다가 집에 와서 레츠비를 마셨는데 평소에는 드럽게 맛없던게 그날따라 맛있었다던지 – 그런 이야기를 한다면 좀 이상하다고 여길 것이다.

어르신은 내가 어떤 직장을 다니며, 무슨 학교를 갔으며, 자녀가 몇살인가 하는 등등의 호구조사 정도로 충분하다. (아직 장가를 못갔거나 자식이 없다면 한바탕 훈계가 따라오겠지…) 사실은 호구조사를 하는 자체가 어르신에게는 관심의 표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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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셜 미디어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블로그가 유행할 때만 해도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을 교환한다는 느낌이 있었다. 블로그의 글들은 좀더 호흡이 길다. 또 블로그에는 한개의 글만 올라오는 것이 아니다. 여러개의 글들은 글쓴이의 다양한 면모를 드러낸다. 독자는 포스팅한 글들을 읽으며 생각을 한다. 그들은 필자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다. 물론 블로그 역시 완전한 소통의 공간은 아니며 어느 정도는 일방적일 수 밖에 없기는 하다.

몇년새 뜨거워진 소셜 미디어는 완전히 다른 세계이다. 페이스북과 트위터, 인스타그램의 독자는 참을성이 없다. 손가락으로 주욱 스크롤을 하다가 맘에드는 문장 / 사진 / 그림이 있으면 Like를 눌러주면 그만이다. 결혼식장에서 만난 어르신이 나의 호구조사에만 관심이 있다면, 소셜 미디어에서는 누군가가 올린 짧은 문장과 사진 속의 찰나가 나와 코드가 맞는가만이 중요할 뿐이다.

정도의 차이겠지만, 블로그의 독자라고 해서 무슨 이야기를 하든 들어줄 준비가 된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글이라면 당연히 최소한의 포장은 필요하다. 이건 아마 글을 읽는 사람을 향한 배려 같은 것일 테다. 사람들은 누구나 바쁜 데, 최소한의 배려도 없으면 그것은 소통을 하겠다는 자세가 아니다. 그런 점에서 나도 블로그에 글을 올릴 때 몇가지 신경 쓰는 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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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내가 형식보다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무래도 글 자체의 내용과 내가 글을 쓰는 목적이다. 나는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 블로깅을 한다. 블로그에서 일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때로는 사회 이슈에 대해 말하기도 하고, 어느 날은 경제 이야기, 또 정치 이야기를 할 때가 있다. 나라는 사람이 관심사가 자주 바뀌고 중구난방이라 오만가지 잡다구리를 이야기 한다. 그래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에 대한 이야기이다. 내가 매일매일 사회의 일원으로, 경제 생활을 영위하며, 정치에 영향을 받으며 사는 사람이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일 뿐이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들이 있는데, 나를 빼놓고 글을 쓴다면 쓰레기 더미를 재생산하는 것밖에 아니지 않나.

나를 드러내고 글을 쓰면 누군가와 척을 지게 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속에 있는 생각은 통제할 수 없는 몬스터 같아서 밖으로 나오면 누군가에게 상처 줄 수 있다. 생각이 말이되고 말이 글이 되면서 여러번의 자기 검열을 거치지만, 보편타당한 두리 뭉실한 이야기만 쓰는게 아니라면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일이다. 나를 드러내고 쓰는 글에는 좋아하는 것, 싫어하는 것, 세상을 보는 방식, 가치판단이 갈리는 의견이 들어가게 마련이다.

거기서 끝난다면 다행인 일이겠지만, 쓰여진 글이 독자의 눈에서 머리로 머리에서 가슴으로 전달되는 과정에서 오해가 생기게 된다. 글을 읽는 사람이 나와 똑같은 문화에서, 똑같은 주제를 공부하고, 똑같은 직업을 가지고, 똑같은 경제적인 형편에 있다면, 오해나 상처가 적어질런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런 것은 가능하지도 않을 뿐더러 나하고 똑같이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글을 써서 의사소통을 할 이유가 별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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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 중에 누가 그런 이야기를 했다. 외로울 때 책을 본다고… 이해가 간다. 책을 읽다가 책의 저자가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고민을 했다는 것을 알게되면 반갑다. 마음이 통하는 친구를 만난 것 같다. 시대가 다르고, 나라가 다르고, 환경이 다른데 나랑 통하는 구석이 있는 친구이다. 어렴풋이 내가 생각했던 것이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정리되어 나오면 그게 그렇게 기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하는 사람들은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감정을 느껴보기를 권하는 것이다. 생각을 강요할 수 없지만, 책을 공유할 수는 있다. 내가 공감했던 책에 같은 감정을 가진다면 그 사람은 나에게 더 가까이 온 것 같다.

어찌보면 글을 쓰는 사람들은 책을 추천하는 사람보다 더 외로운 사람들이다. 다른 사람의 입을 빌리는 것도 모자라서 직접 쓴 글을 내민다. ‘방망이 깍던 노인’을 쓴 윤오영이었던 것 같다. 그는 한 수필집에서 이렇게 말했다. 맘이 통하는 친구와 대화할 수 있다면 글을 쓸 필요가 없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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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에 글을 쓰다보면 유리병에 편지를 적어서 망망대해에 떠내려 보내는 느낌이 든다. 오늘도 유리병 편지를 하나 적어 띄어 보낸다. 이번 편지는 너무 길어서 누가 읽을런지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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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ird culture kid들과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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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t’s Like To Be A Third Culture Kid라는 article을 읽고서…

이리저리 외국을 떠돌면서 유목민처럼 살다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third culture kid가 되어버린다. 이들의 삶은 쿨해보이고 열려있다. 또 이들은 전세계가 자기 집인냥 살아가지만, 동시에 태생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항상 지구 반대편의 무언가를 꿈꾸며,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아야만 하는 이방인의 숙명을 지닌다.

토종 된장이지만 쿨해지고 싶었던 나는 third culture kid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고, 어느새 노마드의 삶을 살고 있으며, 또하나의 third culture kid를 키우는 아빠가 되어버렸다.

복상 ‘불안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 비우기’를 읽고

원글 link: 불안한 사회에서 부모의 욕망 비우기 (복음과 상황 290호 커버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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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으면서 내내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았다. 글쓴이가 하고 있는 이야기는 분명 부모로서 자녀를 키우는 이야기인데, 읽으면서 나는 그시절 나의 부모님의 속내를 들여다보는, 그리고 그때 부모님과의 풀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다시 되새겨 보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자식을 키우면서 부모님을 더 이해하게 되고, 나 자신을 더욱 알게되고, 그리고 여전히 풀리지 않았던 무언가를 더 알게된다. 진솔하게 자식 키우는 이야기를 나눠준 글쓴이에게 감사한다.

+ 덧 (2015/04/27)
링크된 글이 전체공개에서 회원공개로 바뀌었다. 원글을 읽는 것을 추천하지만, 회원가입이 번거러운 분들을 위해 일부 발췌한다. (사실 회원가입이 어렵지는 않다. 기본 정보만 입력하면 된다.)

내가 학력고사를 보고 합격 소식을 기다릴 때, 나는 시한폭탄을 안고 있는 기분이었다. 합격자 발표 당일, 전화를 걸고 ‘합격’이란 소리를 듣자 난 털썩 주저앉았다. 온몸에 힘이 빠지면서 ‘다행이다’란 생각만 들었다. 난 합격하지 못했어도 나름 다시 잘할 자신이 있었다. 세상 물정 모르는 소리라 할지라도 내 마음은 그랬다. 그러나 엄마는 달랐다. 만약 내가 불합격했단 말을 들었으면 엄마는 엉엉 울었을 것이다. 자리에 누워 계속 아팠을 것이다. 그리고 겨우내 ‘내 인생은 의미가 없어’라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았을 것이다. 난 그게 ‘불합격’보다 훨씬 더 두려웠다. 엄마가 가진 그 큰 부담감은 언제나 날 힘겹게 했다. 내 인생에 신경 쓸 시간이나 에너지가 모자랄 정도였다. 엄마의 불안을 걱정하느라고. 엄마의 두려움을 돌보느라고. 그리고 그것에 저항하느라고. 부모와 자녀 사이에 ‘성취’가 크게 자리 잡을 때 그 관계는 서로에게 상처와 짐이 된다.

대학 학비를 댈 만큼 사는 부모들은 자기 자식들도 대학 가서 자기 정도의 경제적 수준을 유지하며 살겠지 생각하는 것 같다. 대학 학비 대기 어려운 부모들은 자식만은 어떻게든 그런 경제적 상태로 밀어 넣어주기 위해 대학에 목을 매는 것 같다. 아는 초등학교 선생님의 아들이 착실하게 공부하여 경영학과를 나와 취업을 준비하는데 돈 있고 빽 있는 친구들이 먼저 취업하는 것을 보고는 왜 엄마는 돈도 없고 빽도 없느냐고 원망하더란다. 얼마나 좌절이 되었으면 그랬을까.

나는 우리 아이가 대학엘 가더라도 ‘바보’가 되길 바라지 않는다. 만약 둘 중 꼭 선택해야 한다면 난 대학생 대신 생각하는 사람이 되길 권할 것이다. 이건 조금만 생각해 보면, 조금만 길게 보면 당연한 결정이다.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시류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거스를 새로운 길을 찾아야 한다. 우리 때와는 또 달라서 점점 두 가지가 양립할 수 없는 정도까지 치닫고 있다. 치열한 입시경쟁과 학벌이 높아도 좁기만 한 채용시장, 돈 이외의 가치가 바닥을 치는 사회. 학벌로도 안 되는 채용시장이라면 자기만의 차별화된 능력, 그 아이만이 가진, 아이가 가장 잘할 무엇을 준비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해야 한다.

다름과 틀림 / 같음과 옳음 (로마서 14장 22절)

최근 교회에서 설교를 듣다가 새롭게 발견한 성경구절이 있어서 공유한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어도 음미해 볼만한 내용이 있는 듯하여 포스팅하기로 했다. 물론 이 글은 나의 다른 블로깅도 그러하듯 그저 잊기전에 남겨두는 메모/일기 같은 글이기도 하다. 내가 읽었던 구절은 다음과 같다.

So whatever you believe about these things keep between yourself and God. Blessed is the one who does not condemn himself by what he approves. (Romans 14:22, NIV)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새번역)

예전에 성경의 로마서를 읽을 때면 무슨 이유에서인지 죄(1~2장)/칭의(3~5장)/성화(6~8장)/하나님의 주권(9~11장) 부분에 집중할 때가 많았고, 실제적인 적용 (12장 이후)에는 그다지 관심을 가지지 않았더랬다. 14장에 이르러서 바울은 부정한 음식을 먹는 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데, 대학시절에는 기독교인의 음주 이슈에 적용하는 구절로만 이 14장을 읽었기에 바울이 이야기 하는 많은 부분을 놓쳤다.

로마서 14장에 친숙하지 않은 분들을 위해서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다음과 같다. 당시 로마 교회에는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 신자와 유대교 배경이 없는 기독교 신자가 섟여 있었다. 따라서 유대교가 금지하는 부정한 음식들을 먹는 것에 대한 논란이 생겼고, 바울은 14장에서 그에 대해 말하고 있다. 바울은 어떤 음식을 먹고, 어떤 날을 중요시 여기고는 중요하지 않으며 교회는 예수의 죽음을 토대로 세워진 곳이기 때문에 서로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어서 22절이 나온다.

이 편지는 기본적으로 교인을 향해 쓰인 편지이다. 그래서 우선되는 적용은 교회에서 벌어지는 일에 대해 하는게 맞을 듯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토대가 된 교회에서 교인들은 서로에게 서로의 잣대를 들이대어 판단하지 말라고 한다. 옳고 그름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이 서로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것이 쉽지 않다. 나의 짧은 경험으로는 종교인은 대부분 옳고 그름에 대한 감수성이 크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 심지어는 목숨(!)을 걸고 지킬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어떤 계기가 생긴다면 아주 맹렬하게 싸우는 사람들이다. 생각나는 여러가지 예가 있지만 굳이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덕이 되지 않을 듯 하다. 예전 이야기를 예로 들면 옛날 사람들은 저렇게 하찮은 것으로 싸웠나 싶을 것이고, 진행중인 이야기를 예로 들면 본인의 관점이 연결지어져서 불필요한 논쟁만 불러 일으키지 싶다.

내가 22절에 주목하게 된 것은 바울이 말한 신념에 대한 태도 때문이다. “그대가 지니고 있는 신념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간직하십시오.” 신념, 혹은 옳고 그름에 대한 잣대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지만, 그 방향이 다른 이에게 향한다면 ‘판단(judgement)’에 그치게 된다. 인간은 판단을 받고서 고치기 보다는 반발하고 상처 받는다. 게다가 그 판단이라는 것이 평소에 신뢰하던 사람으로 부터 온 것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 ‘옳고 그름’이라는 것이 대부분은 바울이 로마서에서 말하는 복음의 핵심 (죄/칭의/성화/주권)과 별로 상관이 없는 것일 때가 많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구절이 내게 오늘 더 다가 왔던 것은 이 문제가 단순히 교회에서의 다툼에 그치는 문제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의 많은 충돌/다툼/갈등 들이 ‘옳고 그름’의 문제에 있어서 오기 때문에 그러하다.

도덕이나 가치 같은 것은 때로 사람들의 차이(좌/우, 근본주의/세속주의 등등…)를 결정짓는 중요한 문제이지만, 흔히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도덕 감각을 갖고 있다는 가정 때문에 쉽게 간과되는 문제 이기도 하다. 이를 테면, ‘아이를 때려서라도 훈계를 시키는 것이 옳은가?’, ‘안전 기준법을 지키지 않아 다친 사람들을 국가에서 얼마나 책임져야 하는가?’, ‘무례한 어른을 공경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어느 수준까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은 각자가 가진 도덕의 감각에 따라 다를 것이고 나는 그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이러한 이슈들에 모든 사람들이 자기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 듯 하다.

바울이 로마서에서 한 이야기를 사회이슈/도덕 감정까지 끌고 가는 것은 약간의 비약이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성경에서 말하는 가치를 사회에서도 적용하며 살아야 한다고 믿는 사람 중에 하나이다. 그래서 내게는 이것이 유의미한 비약이다. 바울은 말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하면서 자기를 정죄하지 않는 사람은 복이 있다.”고… 자신의 신념을 남에게 강요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을 사랑하며 분쟁을 일으키지 않는 일이며, 나아가서 그 신념대로 사는 것 자체가 그사람에 복이 되는 일이라는 것이다. 도덕감각의 화살이 다른 사람에게 향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 향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삶을 진지하게 살아본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지 않을까. 바울은 이런 사람을 가르켜 복되다고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바른마음_The_Righteous_Mind_조너선하이트_도덕심리학_(1)

마지막으로 메모 차원에서 도덕 감각에 관해 들어볼만한 TED 강의를 공유한다. NYU의 business school의 교수인 조너선 하이트(Jonathan Haidt)의 강의이다. 물론 그 분이 성경이야기나 은혜로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이사람은 무신론자이다.) 그는 강의에서 도덕 감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다섯 가지 채널을 통해 설명한다. 워낙 많은 내용을 18분에 압축해서 전달하려고 하다보니 소화하기가 쉽지는 않다.

최근에 들은 바로 그의 책 ‘바른 마음(The Righteous Mind: Why Good People Are Divided By Politics and Religion)’에 더 자세한 이야기가 나온다고 한다. 책에서 나아가서 신념이 형성되는 세가지 원칙에 대해 ‘도덕 심리학’의 관점에서 잘 풀어놓았다고 한는데, 재미있을 것 같다. 읽을 책이 참 많다.

오늘날의 한국 사회는 지역, 성별, 연령, 빈부, 정치로 인해 여러 면에서 사분오열된 형국이다. 나는 이 책이 쓸모 있는 도구가 되어, 한국인들이 서로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길 바란다. 더불어 보다 풍요롭고 보다 공정한 사회를 창조해 가는 데 가치가 있기만 하다면, 한국인들이 편을 막론하고 모든 이들에게서 아이디어와 정책을 구하게 되길 희망해 본다. -조너선 하이트, 한국어판 서문에서

생일 즈음에

한해가 시작되었고, 한살을 더 먹었다. 매년 별 감흥없이 생일이 지날 때가 많은데, 올해는 많은 분들이 축하해주셨다. 참 감사하다. 딱히 세상에 보탬이 될만한 일을 한 기억은 없는데, 따로 챙겨서 기억을 해주시는 분들이 있는 것이 신기하다. 세상에 빚진 것이 많다.

어렸을 때와 달리 가끔은 내 나이를 잊곤 한다. 최근에 누가 나이를 묻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지 않아서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계산을 했야만 했다. 그래서 빠른 계산법으로 생각해낸 게 하나 있는데, 딸의 나이를 기준으로 내 나이를 계산하는 것이다. 나는 딸아이와 정확히 30년 차이가 나기 때문에 내 딸 나이에 서른만 더하면 된다. 내 나이는 기억하지 못해도 딸애 나이는 항상 기억하고 있기에 이 방법이 가장 빠르다. 어느새 삶의 중심이 딸로 이동했다.

감사하게도 딸은 잘 크고 있다. 내가 따뜻하게 잘해주는 아빠는 아닌데도, 자기 아빠를 무척 사랑한다. 이번 생일에는 딸아이가 직접 골라서 내게 잠옷을 선물해주었다. 편한옷을 좋아하는 아빠를 생각해서 특별히 보들보들한 소재의 옷을 골랐다고 한다. 아이의 계획 대로라면 ‘서프라이즈’ 선물인데 입이 간질간질해서 며칠전에 내게 귀뜸해주었기에 품목은 이미 알고 있었다.

딸아이의 기준으로는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이다. 돈모는 재미를 느끼게 해줄 요량으로 작년에 저금통을 마련해 주었는데, 요새는 동전이 생기면 의례히 딸아이의 손에 쥐어준다. 그렇게 일년을 모으니 꽤 묵직해졌다. 그래서 인지 딸아이는 항상 자기가 부자라고 말한다. 한번은 아내랑 내가 어떤 물건을 살 때 너무 비싼게 아닌가 고민을 한 적이 있다. 갑자기 딸아이가 대화에 끼어든다. 자기가 부자니까 걱정 말라며 좋은 걸로 사라고 한다. 아이 때문에 우리 가족도 덩달아 부유한 사람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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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녀석이 어디서 돈이 생겨서 잠옷을 샀을까. 동전만을 모아서는 부족할 터이다. 사실은 얼마전 아이 외할머니가 세뱃돈을 주셨더랬다. 그 돈을 가지고서 엄마랑 선물을 사러 갔다고.. 아이 엄마가 타겟(우리나라로 치면 이마트 같은 곳)에서 할인코너를 기웃거렸더니, 아이가 제일 비싼 몰에가서 제일 좋은 옷으로 골라야 한다고 말하며 단호한 표정을 짓더란다. 결국 아이가 주장한 대로 백화점으로 갔다고… 내가 살면서 받아본 중에 가장 부담스러운 선물이다.

Taylor Swift와 딸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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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10~20대 여자애들 사이에서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는 Taylor Swift. 특히 (그녀의 노래가 컨트리가 베이스라서 인지) 남부에서의 인기는 엄청나다. 특이하다고 생각이 든건, k-pop은 10~20대 여자 가수들은 30~40대 아저씨 팬덤을 공략하고 남자 가수들은 여심을 흔드는게 전략 포인트인데, 이동네는 오히려 반대로 10~20대 여자 가수들이 또래 여자아이들의 감성을 노래한다. 어찌보면 이게 자연스러운 것 같기도…

30대 거무죽죽한 동양 남자가 뭐 Taylor Swift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겼겠나. 이건 아무래도 딸아이 때문이다. 어제 딸내미가 초등학교 가서 또래 친구 (Hailey라는 전형적인 남부 백인 여자아이) 한테 Taylor Swift 노래를 들었다며 유튜브로 틀어달라고 해서 같이 듣고 딸내미의 막춤을 감상해야 했다.

딸내미에 의하면 Hailey는 Taylor Swift의 노래를 다 외우고 있고, 특히 ‘Shake it off’를 좋아하는데, 자기는 ‘Out of the Woods’가 더 좋단다. 아직 7살 밖에 안된 유치원생 아이들이 틴팝을 좋아한다는게 신기하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다.

이게 왜 더 나를 당황스럽게 했냐하면, 취향의 영역 (이를테면 음악/미술 등등…)이 지금까지는 부모의 영향을 더 받고 있다고 생각했고, 아이가 나나 부인의 일부분을 닮아가고 커가는게 뿌듯하기도 하고 그랬는데, 이제 그러한 영향을 외부에서도 받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특히나 취향의 부분까지) 앞으로는 점점 더 커질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다. 미국에서 아이를 키우기에 그 외부의 영향력이라는게 좀더 이질적이지 않을까 하는 괜한 걱정은 덤.

이런 부질없는 생각 해서 뭐하겠나. 결국 자녀라고 해도 내것도 아닌데… 딸내미랑 좀더 이야기 나누고 대화라도 따라가려면 결국 딸아이가 좋아하는 노래도 들으면서 같이 막춤도 쳐주는 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