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Medieval Times라는 디너쇼를 보았다. 중세시대 기사들의 마상시합 토너먼트를 재현하는 쇼이다. 음식도 기대보다 괜찮았고, 서커스를 방불케하는 마상묘기와 칼싸움 재현이 볼만했다. 아이들도 좋아했고 나도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
토너먼트에는 여섯명의 기사가 등장한다. 극장에 입장할 때 각기 응원할 기사를 알려주고 자리를 정해준다. 우리 일행은 Black & White Knight 을 응원하게 되었다. 본격적인 토너먼트가 시작하기 전, 식사와 잠깐의 여흥이 제공되었다. 식사가 마무리 되고 분위기가 정돈될 무렵, 드디어 우리의 기사님이 등장한다.
이탈리아계인 우리의 기사. 투구를 벗자 갈색 곱슬머리가 턱까지 흘러 내린다. 운동으로 다져진 몸과 건장한 젊음에서 뿜어져 나오는 패기가 보는이를 흥겹게 한다. 그는 관객을 향해 윙크를 살짝 날려주신다. 말을 타고 달리다가 우리 진영을 지날 때면 창을 높이 올려 호응을 유도한다.
무릇 기사라면 아리따운 공주와 그녀의 응원을 빼놓을 수 없는 법. 우리의 Black and White Knight은 카네이션을 자기의 여인내들에게 던져준다. 그의 승리를 응원하던 여섯살 우리 딸. 기사가 던진 꽃이 날라와 이마에 맞자 진심으로 감격한다. 그 순간부터 꽃은 아이의 소중한 보물이 된다. 꽃을 작은 두손으로 꼭 쥐고 승리를 응원한다.
고등학교 시절 운동회가 생각 났다. 나는 남녀공학을 다녔다. 이성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달하는 10대 후반. 운동회는 남자들에게 수컷다움을 한껏 뽐낼 수 있는 장이다. 그중 하이라이트는 계주. 달리기 좀 한다 싶은 친구들은 계주에서 육체적인 능력을 한껏 과시한다. 여자반을 지나칠 때 시크한 표정을 지어주며 호응을 유도하는 몇몇 수컷들. 여자아이들은 자신이 응원하는 수컷을 열정적으로 응원하며 축제를 만끽한다.
나는 운동에 별 소질이 없는 nerd과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종류의 축제는 항상 어색하다. 축제의 현장에서 조금은 쿨한척 한발짝 떨어져 있는게 주로 나의 전략이다. 우수한 수컷들 사이에서 들러리로 서는 것은 100%로 지는 게임이다.
그날 나는 딸아이와 함께 그녀의 기사님을 응원했다. 쇼가 시작할 때, 연회를 주관하는 왕과 공주는 기사도(chivalry)를 외쳤다. 쇼를 마치고서 깨달았다. 마상시합토너먼트의 처음이자 끝은 chivalry라는 것을… 나는 다른 관객들과 함께 chivalry를 반복해서 외쳤다. 고등학교 운동회에서도, 영화 글래디에이터를 보면서도, 축구경기를 관람하면서도 못 느껴본 그것을 그날 느꼈다. 딸아이와 함께 있기에 감정이입이 가능했던 것일까?
공주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각오하고 달려드는 돈키호테의 기사도는 밖에서 지켜볼 때는 웃음의 소재일 뿐이지다. 그러나 그 세계를 안에서 체험하면 피와 땀이 흐르는 진지한 가치가 있는 세계이다. 그것은 굳이 밖에 서서 쿨한척 코웃음을 치고서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숭고함이다.
허무하게도 그날 우리의 Black & White Knight은 토너먼트 첫 경기에서 바로 탈락했다. 크게 낙담한 우리 딸아이를 달래는 것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이제 집에 가서 나를 달래기 위해서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꺼내야 겠다. 지금은 그 책에 도전해 볼 준비가 된 듯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