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념일 챙기는 데에 1만큼의 소질도 없고 고지식하기만한 아빠의 딸내미 발렌타인 데이 챙기기 분투기를 남긴다.
우선 작년 이야기부터.
딸아이가 발렌타인 데이에 대해 알게되었다. 유치원에서 아이들끼리 캔디를 주고받았던 듯. 아이가 엄마에게 초콜렛을 선물하고 싶어했다. 아빠는 설명 욕구가 솟구쳤다. “발렌타인 데이는 연인들끼리 선물을 주고 받는 날이야. 보통은 좀 커서 여자친구, 남자친구가 생기면 초콜렛을 주고 받지. 요새는 꼭 연인 사이가 아니어도 남자/여자 끼리 주고 받기도 해. 그치만 여자끼리 주고 받는 것은 좀 이상하지?” “그럼 엄마한테 초콜렛을 못주는 거야?” “엄마는 여자니까 원칙적으로 그렇지. 주고 싶으면 줄 수 있지만, 그건 발렌타인 데이라서라기 보단 그냥 초콜렛을 주고 받는 거니까.” “그럼 엄마한테 초콜렛을 못주는 거야?” “주고 싶으면 줄 수 있긴 한데…”
아이는 울음을 터뜨렸다.
아빠는 올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요즘은 발렌타인 데이를 굳이 남녀상열지사와 연결시킬 필요도 없다. 미국 초등학생들은 초콜렛과 편지를 부모들이 준비해서 남녀에 관계 없이 초콜렛을 주고 받는다. 어차피 미국에는 화이트 데이도 없으니 복잡할 것도 없다.
아이와 홀푸드 Whole Foods 에 가서 엄마 선물을 준비했다. 올해는 아이 외할머니도 계시니 하트모양 초콜렛을 두개 준비했다. 아빠는 초콜렛 대신 하얀 튤립을 샀다. 꽃을 화병에 꽂으니 집안 분위기가 살았다. 엄마와 할머니도 초콜렛을 좋아했고 아이는 흐뭇해했다. 둘째가 크면 다음 번에는 근사한 외식을 해도 좋을 것 같다.
저녁을 먹는데 아이가 나지막히 이야기 한다. 다들 초콜렛을 받았는데, 나만 없네. 아차! 며칠전에 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초콜렛을 주고 받았기에 괜찮을 줄 알았다. 아이에게 갓난아이 때문에 집안이 전쟁터이니 이해해달라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 시간이 좀 늦었지만, 집앞 마트에 가서 초콜렛을 사서 교환할까? 어차피 아빠도 못받았으니까 서로 사주면 되지.” 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잘됐다. 모아둔 돈이 있어. 초콜렛이 50불은 안넘겠지? 지난번에 세배돈 받은게 있는데.” “그럼 그거면 충분하지. 제일 맛있는 초콜렛을 골라서 아빠 사줘.”
아빠는 핑크색 하트 모양 박스에 담긴 무난한 트러플 초콜렛 truffle chocolate을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발렌타인 때는 어디서나 살 수 있는 평범한 종류이다. 그런데 마트 구석 발렌타인 코너에서 초콜렛을 일일이 확인하던 아이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다. 아이는 포장뿐 아니라 내용물까지 봤는데 딱히 맘에 드는 초콜렛이 없는 모양이다.
아빠는 무난해 보이는 고다이바 Godiva selection을 집어 들었다. “아빠는 이거면 될 것 같은데. 너는?” “그래? 좋아 아빠 맘에 드는게 있어서 다행이다. 그거 사고 갈까?” “너는?” “음… 타겟 Target에 가볼까? 거기서 내가 본게 있는데.” 오늘을 넘기기에는 마음이 편치 않다. “그래 Target에 가자.”
8시 45분경, Target의 초콜렛 섹션에 물건이 많이 남지 않았다. 특히 발렌타인용으로 포장된 초콜렛 중에서 아이의 맘에 드는 초콜렛이 없었다. 아이는 독일에서 먹어본 밀카 Milka 류의 부드러운 밀크 초콜렛을 원했다. 유럽에서는 흔한 브랜드이지만, 미국에서 구하기는 조금 어렵다. 게다가 이시간에는…
내년에는 더 좋은 것을 사기로 하고서 하나씩 초콜렛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이는 기분좋게 초콜렛을 먹은 다음 양치를 하고 엎드려서 책을 보고 있다. 혹시나 싶어 아빠는 아이에게 말을 걸어봤는데, 초콜렛 이야기는 이미 잊은 것 같다. 그래도 아빠는 왠지 잘못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의 취향을 알았으니 내년에는 좀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일년 후에 아이는 좀더 여자가 될 것이고, 무신경한 아빠가 알 수 없는 복잡 미묘한 무언가가 더 생기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느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