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ciety never advances.

“Society never advances. It recedes as fast on one side as it gains on the other. It undergoes continual changes; it is barbarous, it is civilized, it is Christianized, it is rich, it is scientific; but this change is not amelioration.”
from ‘Self-Reliance’ Ralph Waldo Emerson

“사회는 결코 진보하지 않는다. 다른 한 편에서 하나를 얻으면 그만큼 빨리 무언가는 퇴보한다.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한다. 야만적이었다가, 문명화되었다가, 종교적이었다가, 과학적인 세상이 된다.”
<세상의 중심에서 나를 외치다> 중, 랄프 왈도 에머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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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잦은 포스팅에 대해서

말이 너무 많으면 공해가 된다. 예전에 한참 힘들 때, 다른이가 올린 페북 포스팅을 보면서 짜증이 난 적이 있다.

‘페북은 시간이 남아도는 사람들이 외로움을 달래려고 시간을 죽이는 곳이다!’

요새 내 포스팅의 빈도가 너무 잦다. 누군가는 내 포스팅을 보고서 예전의 나와 같이 짜증을 내고 있을런지도 모를 일이다.

PostItNotePad

피시통신 시절부터 나의 게시 원칙은 ‘하루에 하나 이상 글을 올리지 않는다.’ 였다. 글을 두개 이상 올리게 되면 읽는 사람들이 피로를 느낀다. 게시자에게 개인적인 애정이 있거나 친목질을 하는게 아니라면 게시물 도배 행위는 누군가에게 소외를 가져온다.

내가 포스팅하는 목적은 메모하기 위함이다. 그러다 보니 지나치게 자주 포스팅하게 된다. 예전에는 수첩에 생각을 적곤 했는데, 페북에 적어보니 메모를 공개하는 데에서 오는 장점이 있다. 소통을 통해서 생각이 넓어진다. 또, 공개하기 때문에 생각을 한번더 가다듬게 된다. (단점도 있는데, 잠깐 메모하러 들어왔다가 다른 분들 포스팅에 눈길을 주는 바람에 타임머신을 타버린다.)

그래도 역시 다른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볼 여유가 없는 이에게는 너무 잦은 포스팅은 공해이다. 그런 분들은 조용히 unfollow버튼을 눌러 주시기를 바란다. (unfriend가 아니다. 그거 누르면 상처받을지 모른다. ㅎㅎ) 그러면 내 메모들 (또는 like/comment들)이 만들어내는 소음에서 자유로워 질 수 있다.

+ 덧: 며칠전 페이스북에 올린 글을 블로그에 옮겨왔습니다.

우리말에서 높임말과 낮춤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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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에는 높이거나 낮추는 말의 등급이 되는 많은 것이 문제가 되어있다. 말이 이렇게 되어서 우리들 생각이나 행동이 자유스럽지 못하고, 민주사회를 창조해가는 일도 온갖 어려운 일에 걸리고 빠져들고 부딪히고 하여 제대로 안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높임말을 적게 쓰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한다. 더구나 실제로 말에서는 안 나오는 높임말을 문학작품에서 쓰는 것은 우리말을 뒷걸음치게 하고 우리말을 죽이는 잘못된 글쓰기라 하겠다. – 말꽃모음. 이오덕 글 이주영 엮음. 2014 단비, 재인용 (http://acase.co.kr/2014/12/01/word14/)

포스팅할 때 내 원칙은 경어체를 쓰지 않는 것이다. 이유는 이오덕 선생님의 말로 대신할 수 있을 듯.

딸과의 대화 모음 (집안일/성경/반대말에 대한 잡담)

첫번째

아내: (세탁기를 돌리고 나서 설겆이를 하다가) 일이 해도해도 끝이 안나.
딸램: (무심한 듯 앉아있다가) 집안일은 원래 그런거야.

으이구 애늙은이.

두번째

오늘은 아이에게 성경에 있는 엘리야 선지자 이야기를 읽어주었다. 아이가 물었다. “아빠, 엘리야 선지자는 남자야? 여자야?” “남자.” “왜 이렇게 성경에는 남자가 많아? 나는 여자인데.”

한번도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여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과 남자의 눈으로 성경을 읽는 것은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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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번째

딸아이에게 ‘쥐죽은 듯이 조용하다.’라는 표현을 가르쳐 주었다. 며칠후 딸아이가 시끄러운 곳에서 이렇게 말을 한다. “쥐살은 듯이 시끄럽네.”

가끔 우리말의 상투적인 표현을 뒤집어 보아도 재미있다. 그러면서 표현의 유래/의미/어감을 다시 되새겨 보게 된다.

야후의 구원투수 – 마리사 마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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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The daily signal)

야후는 내게 한동안 잊혀진 이름이었다.

3년 전인가 구글 출신 여자 CEO를 영입한다는 뉴스를 들었을 때, 아직 안망했나 싶어서 고개를 갸우뚱했다. 얼마전 알리바바와 관련해 이름이 들렸을 때는 쉽게 사라지지는 않겠구나 싶었다. 여전히 미래가 밝아보이지는 않다만, 그래도 힘겨운 싸움을 계속하는 그들에게 박수를 보낸다.

마리사 마이어의 야후 (naver letter)

권남훈 교수님 세월호 단상을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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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남훈 교수님의 글. 이글이 쓰여진 시점 (작년 4월)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차분하고, 균형잡혀있는 시각에 감탄한다.

세월호에 대한 단상 1

이슈가 되는 사건이 벌어졌을 때, 어떻게라도 한마디 보태기에 바쁜 페북세상을 보면, 때로는 침묵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이야기만 집중하는 사람들이 참 귀하게 여겨진다. 침묵하는 것이 방관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반성하고 열심히 생각해서 그런 일이 다시 벌어지지 않도록 해야한다.

대형사고는 연쇄적인 부실이 중첩되어 일어난다. 그 고리 중간의 누구 하나 만이라도 역할을 제대로 하고 있었다면 비극은 발생하지 않았을 터. 그러나 아쉽게도 그 고리의 중간을 이어가는 ‘이름 없는 영웅들’은 빛이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들이 역할을 잘한다면, 사고는 없을 것이고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이세상을 그나마 돌아가게 만드는 것은 이러한 ‘이름 없는 영웅들’이라고 생각한다.

허락받지 않고 글을 링크 걸었는데, 전체공유로 되어 있는 글이기에 권교수님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고 믿는다.

일곱살 딸에게 시간이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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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source: wikimedia)

딸애는 어려서부터 잠이 없었다. 갓난쟁이 때는 바시락 소리만 나도 기다렸다는 듯이 울어댔다. 크면서도 뭐가 그리 무서운지 자다 말고 깨서 무섭다고 난리다. 만 세살이 되어서야 자다가 깨는 일 없이 한밤을 그대로 자기 시작했다. 건강에 이상이라도 오는게 아닐까 싶어 의사에게 물었더니 잘 크고 있으니 문제는 없다 했다.

세상에 궁금한 것 투성이라 자는 시간도 아까운가부다. 아이 때 낮잠이라도 재울라 치면, 잠깐 눕는 듯 하다가 밖이 궁금해 못참는다. 만으로 두살 반 되던 때에 낮잠을 재우는 걸 포기했다. 가능하면 9시 이전에 재우려고 일정한 시간에 침대에 눕히는데, 하루종일 있던 일을 되새기느라 잠이 들려면 한시간이 넘게 걸린다. 혼잣말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깔깔 웃기도 하고, 아빠를 호출하기도 한다.

9시 45분 경. 무섭다며 침대에 누어서 아빠를 호출한다. 무슨 일인가 가봤더니 잠깐 도란도란 시간을 갖자고 한다. “아빠, 왜 이렇게 시간이 빨리 갈까? 음… 있잖아 5분이 한 몇 초만에 지나는 것 같아. 그리고 자고 일어나면 시간이 훅 지나는 게 너무 아쉬워.”

아이구 이놈아 일곱살 아이에게 시간이 그렇게 빨리가면 엄마 아빠는 어쩌란 말이냐.

Third culture kid들과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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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at It’s Like To Be A Third Culture Kid라는 article을 읽고서…

이리저리 외국을 떠돌면서 유목민처럼 살다보면, 아이들은 어느새 third culture kid가 되어버린다. 이들의 삶은 쿨해보이고 열려있다. 또 이들은 전세계가 자기 집인냥 살아가지만, 동시에 태생적으로 어디에도 속하지 않으며, 항상 지구 반대편의 무언가를 꿈꾸며, 누군가에게 오해를 받아야만 하는 이방인의 숙명을 지닌다.

토종 된장이지만 쿨해지고 싶었던 나는 third culture kid와 사랑에 빠져 결혼을 했고, 어느새 노마드의 삶을 살고 있으며, 또하나의 third culture kid를 키우는 아빠가 되어버렸다.

광명시에 들어온 이케아

한국에는 이케아가 이슈인가부다.

조립하는 수고로움과 가구의 짧은 수명 때문에 개인적으로 선호하지 않지만, 얇은 지갑 사정을 따지다 보면 결국 가게 되는 곳이 이케아다. 그렇지만 조립하는데서 재미를 느끼고 (하다보면 레고 조립하는 류의 재미(?)를 느낄 수 있다. ㅎ) 합리적인 가격으로 집안 꾸미는 것을 즐기는 사람에게는 이케아 만한 놀이터가 없다.

세상은 한참 글로벌화 되었는데, 규제하는 모습은 예전 그대로이고, 만만한 놈 때리는 언론의 모습도 그대로이며, 심지어는 속이 빤히 보이기 까지 한다.

관련 웹툰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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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자’의 ‘권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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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는 태도가 나쁜 자에게는 대답하지 말고, 대답하는 태도가 나쁜 자에게는 묻지도 말고, 말하는 태도가 나쁜 자에게는 듣지 말며, 시비조의 사람과는 논변하지 말라.

반드시 도에 따르는 사람과 접촉하고 도를 따르지 않은 사람은 피할 것이다. 몸가짐에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라야 도의 이치를 말할 수도 있고, 안색이 부드러운 사람이라야 도의 극치를 말할 수 있다.

아직 서로 말할 수 없는 사람과 말하는 것을 일러 소란스럽다고 하며, 서로 말할 수 있는 사람과 말하지 않는 것을 일러 감춘다고 하며, 표정을 관찰하지 않고 말하는 것을 일러 장님이라고 한다.

그러나 군자는 소란을 떨지 않고 감추지 않으며 눈먼 장님 노릇을 하지 않도록 그 자신을 삼가 조심해야 한다. <시(詩)>에 이르길, ‘저 사람은 교제가 조금도 소홀하지 않아 천자가 상을 내리는 구나’라고 하였으니, 이것을 가리켜서 하는 말이다. (<순자>, <권학(勸學)>)

(출처: 블로그 내마음의 풍경 (재인용))

온라인 세상을 돌아다니다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서로를 죽일 듯이 싸우고 논쟁한다. 근데 어느 순간엔가 논쟁함이 그다지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 특히나 상대방이 이야기를 들을 생각이 없을 때에 더욱 그러하다. 생각해보면 누군가를 설득하기 위해 논쟁을 벌이는 행위 자체가 무척이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행위이다.

유교는 논쟁 자체나 논리적인 완결성보다는 태도와 자세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가 많은데, 2000년이 지난 순자의 이야기가 오늘날에도 보편타당한 지혜로 다가 온다는 것이 신기하다.

잊기 전에 남겨두려고 포스팅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