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년 이코노미스트 자료.
이민자의 학력과 자국민의 학력을 비교해서 도표로 나타내었다. 대체로 경기가 안좋은 나라(eg. 그리스, 스페인 등)가 외국인 학력 인플레가 심하다. 반면, 미국은 비교적 낮은데, 학력이 중요하지 않은 저숙련 직업의 이민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미국 사는 외국인 노동자 입장에서 흥미로워서 스크랩.

2008년 이코노미스트 자료.
이민자의 학력과 자국민의 학력을 비교해서 도표로 나타내었다. 대체로 경기가 안좋은 나라(eg. 그리스, 스페인 등)가 외국인 학력 인플레가 심하다. 반면, 미국은 비교적 낮은데, 학력이 중요하지 않은 저숙련 직업의 이민이 많아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미국 사는 외국인 노동자 입장에서 흥미로워서 스크랩.
작년 10월. AT&T(미국 2위의 통신사, 우리나라로 치면 KT)의 무제한 데이터 요금제에 FTC(미연방 통상 위원회)가 제동을 걸었다. 과장광고 라면서 조사를 시작했다. AT&T가 일정 용량을 쓰고 나면 데이터 전송속도를 느리게 했다고 한다. 당시 FTC 의장의 트윗이 재미 있어서 리트윗했던 기억이 있다.

며칠전 FCC(미연방 통신위원회)가 결국 1억달러의 벌금을 매겼다는 뉴스를 봤다. (우리돈으로 무려 1000억원이다. 후덜덜)
개인적으로는 ‘세다.’ ‘화끈하다.’는 느낌을 일단 받았다. 기업인의 범죄에 대해 미국은 상당히 강하게 대처한다. 우리나라처럼 벌금내고 말지… 라는 식의 안일함이 잘 통하지 않는다.
기업뿐만 아니라 전 분야가 그러해서, 표절/컨닝/법규위반 등에 거의 심할 정도로 애누리가 없다. 가끔 이들이 준법정신이 강한 이유가 그래서 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공권력도 강하고, 국방비, 치안 유지비도 상당한 비중의 예산을 쏟아 붓는다. 대신 법만 지키면 무얼해도 관심도 없고 참견도 안한다.
우리나라랑은 나라가 작동하는 원리가 다르고, 유럽과 비교해도 사뭇 다르다. 자유라는 것의 대가가 그렇게 가벼운 것은 아니다.
Tom Gauld라는 일러스트레이터다. the guardian에 카툰 연재를 하고, the new yorker의 표지 작업을 몇번했다. 코드가 맞아서 가끔 본다. 몇개 소개한다.
(image source: flickr)
관심이 있는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참조하길… 작가의 블로그, Flickr 이미지
내가 사는 동네는 미국의 아틀란타다. 그런데 아틀란타에 살면서 한가지 곤란한 점이 있었다. 그것은 한국인이 ‘아틀란타’를 제대로 발음하기가 만만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틀란타로 이사온 처음 몇달간, 미국 사람들은 내가 발음하는 ‘아틀란타’를 알아듣지 못했다. 발음기호대로 또박또박 애!틀!란!타!를 외쳐도 아무도 못알아 듣는 것이다.
(image source: flickr)
내가 사는 도시 이름을 제대로 발음 못하는 것은 모양새가 빠져도 너무 빠진다. 그래서 미국인이 발음하는 소리를 유심히 들어보았다. 그랬더니 미국인들은 ‘앨~래나’ 이렇게 발음하는게 아닌가. 그래서 비슷하게 흉내내면서 ‘앨~래나’라고 말하니 그제야 알아듣는다. 쓰여진 단어대로면 ‘애틀란타’라고 발음하는 게 맞는 것 같은데 왜 이렇게 되는 것일까?
미국인들이 Atlanta를 ‘앨~래나’로 발음하는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이유: 2음절 강세단어
첫 번째는 강세 때문이다. Atlanta는 2음절에 강세가 있는 단어이다. 강세는 한국어에는 없는 것이다. 우리말은 기본적으로 모든 음절을 강하게 발음한다. 그런데 영어는 그렇지 않다. 단어에 고저/강약/리듬이 있다. 원어민은 발음 뿐만 아니라 강세까지 포함해서 단어를 인식한다. 그런데 이를 무시하고 발음을 하면 원어민은 그 단어를 알아듣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나라식으로 Atlanta를 끊어서 애!틀!란!타!라고 발음하면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다. 1음절인 ‘At’을 약하게 발음하고 2음절인 ‘lan’을 강하게 3음절의 ‘ta’는 아주 약하게 발음을 해야한다. 미국사람들은 강세가 없는 음절의 t발음은 거의 생략한다. 그러면 ‘애ㅅ래나’가 된다.
강세는 신경쓰지 않으면 놓치기 쉽다. 우리 기준으로는 몰라도 알아듣는데에는 지장이 없기 때문에 인식조차 하지 못한다. 원어민이 ‘앨~래나’라고 말하면, 들을 때는 알아들었다고 해도 강세를 신경쓰지 않고 듣기 때문에 말할 때는 ‘애틀란타’라고 하게 된다.
비슷한 단어가 fantastic이다. 한국인들은 대부분 1음절에 강세를 주고서 ‘팬태스틱’이라고 발음한다. 그런데 강세를 1음절에 두고 말하면 원어민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팬태스틱’이라고 2음절에 강제를 두고 말하면 그제야 그들은 알아 듣는다. (내 경험담이다.) 발음을 신경쓰시는 분들은 fantastic의 f를 p와 구분해서 발음하는데 그분들도 강세를 틀릴 때가 많다. 이러면 발음은 굴리는데(?) 강세가 틀리니까 더 이상하게 들린다.
이런 예라면 정말 많다. 또 우리나라 사람들이 발음을 잘 못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coyote인데, 어떤 분이 발음을 굴려가면서 ‘코~요~테’라고 말해서 듣기가 좀 어색했던 적이 있다. 역시나 미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그분은 본인이 혀를 덜 굴려나 싶었는지 한껏 오버해서 ‘코~요~테’를 다시 한번 말씀하셨다. 다시한번 서로 못알아 듣는 민망한 상황이 발생했다. 사실 미국식 발음으로 coyote는 ‘카요리’라고 발음해야 한다. 게다가 이 단어는 2음절에 강세가 들어간다.
둘째 이유: 모음이 없는 소리
Atlanta가 발음이 어려운 데에는 중간에 들어간 t 사운드도 한 몫을 한다. 한국어는 기본적으로 모든 소리에 모음을 붙여서 발음을 한다. 그렇다보니 자음만 있는 소리에도 습관적으로 ‘~으’를 붙여서 발음한다. Atlanta의 경우는 ‘At’와 ‘lan’사이에 모음이 없다. 그렇지만 우리는 습관적으로 ‘At’와 ‘lan’ 사이에 ‘~으’를 넣어서 발음을 하려 한다. ‘앳~래나’가 ‘애틀랜타’가 되면 3음절 단어가 아닌 4음절 단어가 된다. 이렇게 되면 원어민은 더욱 알아듣기 힘들어 한다.
‘~으’를 붙이는 습관이 어디서 생겼는지 잘 모르겠다. 내가 추측하기로는 일본식 영어에서 온게 아닌가 싶다. 우리는 알파벳을 처음 배울 때도 ‘~으’를 붙이면서 발음하는 것을 배운다. 대표적으로 잘못 발음하게 되는 알파벳이 ‘V’이다. ‘V’는 ‘브이’라고 발음하는 게 아니라 ‘비~’라고 발음하는게 맞다. 이런 식으로 엄격하게 말하면 메칸더 브이는 메칸더 비가 되야 한다. ‘V’를 신경을 써서 b발음이 아닌 v발음으로 해도 ‘~으’를 붙여서 ‘브이’라고 말하면 미국 사람들은 알아듣지 못한다.
경험담이 있다. 체외 수정(시험관 아기)을 뜻하는 IVF(in vitro fertilization)를 발음할 때 ‘아이-브이-에프’라고 발음했는데, 잘 못알아 듣더라. 나는 IVF가 너무 전문용어인가 싶어서 시험관 아기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을 해줬는데, 그제서야 그 친구가 아~ ‘아이-비-에프’라고 하는 거다.
발음과 강세가 중요한가?
솔직히 발음과 강세가 그렇게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번에도 글을 쓴적이 있지만 (발음/관사/전치사 이야기) 의사소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문장 구사력이다. 기본적으로 문장구사력이 된다면 의사소통에 큰 문제가 없다.
또 한국에 살면서 원어민과 대화할 일이 얼마나 되겠는가. 원어민이 아니고 영어가 외국어인 사람들 끼리는 발음이 달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어차피 그들도 발음이 미국식이 아니다. 오히려 서로 미국식(또는 영국식) 발음을 못하기 때문에 발음이 틀려도 잘 알아듣는다. 외국나가서 일본사람들하고 서로 영어가 잘 통했던 경험을 해본 사람은 이게 무슨 말인지 알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배워야하는 이유는 영어가 ‘세계어’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의사소통을 할 때는 영어를 사용한다. 이는 국가 간에 무역을 할 때 달러화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달러는 미국의 돈이지만 세계 기축통화로의 역할도 한다. 우리가 영어를 배우는 이유가 세계어를 배우는 데에 있다면 발음이 그렇게까지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현실적으로는 우리끼리 영어할 때, Atlanta를 ‘애ㅅ래나’ coyote를 ‘카요리’라고 발음하면 아무도 알아 듣지 못한다. 혹은 누가 알아듣는다고 한들, ‘너무 빠다 발음하신다~.’ 라고 생각하며 속으로 비웃을 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지만 최근 한국의 영어교육에 speaking이 강조되는 것도 무시못할 추세이긴하다. 지금의 영어 교육은 내가 영어를 처음 배우던 시절하고는 많이 달라지긴 했다. 살다보면 쓸데없는 지식도 도움이 될 때가 있다. 강세 같은 부분도 알아둔다면 언젠가 유용하게 써먹을 날이 올런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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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가지 언어 사용이 만드는 번역체 말투들 – 우리집 사례
강세와 발음 – Atlanta, fantastic, coyote
200번째 포스팅을 기념하여, 인기글과 추천글을 정리해봤다. 일년간 글이 쌓이면서 꽤 두서가 없어졌다. 이곳을 효율적으로 산책할 수 있는 이정표가 되었으면 한다.
(image source: wikimedia)
100번째 포스팅 중간결산 때에 누적조회수가 2,500이었는데 지금은 9,000이 조금 넘는다. 약 2.5배 정도 트래픽이 증가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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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6월 5일자 기준
글을 쓰다가 자의식 과잉이 될 때가 있다. 오늘 글이 그러한데, 쓰다보니 개똥철학 교육론이 되어버렸다. 나는 교육에 대해 전문지식도 경험도 없는 평범한 회사원에 불구하다. 그렇지만 동시에 한 아이의 아버지이기도 하기 때문에, 생각을 정리하는 의미에서 글을 적어본다.
질문이 왜 잘못되었는가?
두달 전에 Ivy League와 미국 교육 시스템에 대한 비판글을 공유한 적이 있다. 나는 거기서 아이비리그를 비판하는 글을 읽어봐야 딱히 해결책이 있는게 아니다. 부모의 입장에서 현실적으로 ‘명문대에 입학하되, 속물이 되지 않고, 생각할 줄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을 바라는 게 당연하지 않는가라고 얼버무리며 결론을 내었다.
그런데 글을 쓰고서 내내 찝찝한 거다. 왜 찝찝한가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질문이 잘못되지 않았는가 싶었다. 어떤 경우는 ‘질문에 무엇을 답하는가’보다 ‘어떻게 질문을 하는가’가 더욱 중요하다.
말하자면 이런 거다. 인용한 칼럼의 필자의 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이다. 필자는 Ivy League 시스템을 통렬히 비판했다. 그리고, 대안으로 (약간은 소심한 뉘앙스로) 주립대와 리버럴 아츠 칼리지를 제시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필자가 질문에 대한 답을 해야하기에 어떤식으로든 대안을 제시하긴 했는데, 본인도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에 성급하게 마무리 지은 모양새다.
그 글을 읽었던 나도 필자의 논지를 따라가면서, ‘아이비리그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아니면 한국의 명문대가 주는 가치가 무엇인가.’, ‘그러면 나는 내 자식에게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생각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해야하는가?’라는 질문은 잘못되었다. 그 질문은 ‘아이들이 Ivy League에 진학을 하면 행복할 것이다.’, ‘성공할 것이다.’,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이다.’ 라는 전제를 가지고 시작한 질문이다. 그 글을 읽는 사람은 자연스레 Ivy League와 인생의 성공을 놓고서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며 판단을 하며 글을 읽게 된다.
질문을 제대로 하려면 ‘아이들이 어떻게 해야 행복하게 살 것인가?’ ‘생각하는 법을 배울 것인가?’ ‘부모는 자신의 기대를 아이들에게 어떻게 풀어낼 것인가?’ 부터 시작해야 한다. 어찌보면 명문대에 진학하는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이다. 중요하지 않은 문제라는 말이 아니라 본질이 아닌 질문이라는 것이다. 명문대에 간 아이가 불행할 수도 있고, 아닌 아이가 행복할 수 있다.
누군가는 계속 물을 수 있다. ‘그래도 역시나 명문대에 가는 문제가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그래도 그 누군가가 이 질문을 여전히 한다면, 나는 그분에게 당신은 잘못된 질문의 늪을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해줄 것이다.
진정 중요한 질문은
내가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질문은 ‘어떻게 부모로서 아이에게 대리욕망을 하지 않는가?’ 이다.
아이는 언제나 아이의 삶을 산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낀 것 중에 하나는 아이의 어떤 면은 나와 무서우리 만큼 닮은 동시에, 어떤 면은 정말로 생소한 이질적인 부분이 있다는 것이다. 아이가 여섯/일곱살이 되면 그때부터 자의식이라는 게 생기게 되고, 조금씩 부모의 품을 떠난다. 유치원을 가게 되고 친구와 교류가 생긴다.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보면 어느 순간, 아이가 집밖에서 배워온 것을 알고 말할 때가 있다. 부모의 눈에는 여전히 아기로만 보이는데, 아이는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터득하고 세상의 지식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럴 때면, 아이는 내 소유가 아니구나. 스스로 크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다.
내가 어떠한 기대를 아이에게 가지고 있던지간에 아이가 스스로의 삶을 산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부모는 일반적인 사회 통념과 한정된 인생경험으로 아이에게 가장 유익할 것으로 생각되는 길을 제시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 그것은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아이에게 강요하는 것일 때도 있다.
부모의 역할
아이를 그냥 내버려두고,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인 나이 중간 값은 마흔하나이다. 그렇게 보면, 나는 인생의 반환점에 거의 다다른 샘이다. 짧게 나마 나를 돌이켜 보면, 나는 내가 진정 원하고 좋아하는 것을 아는데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내가 좋아하는 것/잘하는 것을 충분히 알지 못한다.
실존주의의 개념을 살짝 변형시켜 빌려오자면, 인간은 세상에 내동댕이 쳐진 존재이다. 내가 그러했듯이 아이는 본인이 좋아하는 것을 알아가는 데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처음에 재미도 없고, 흥미를 못붙인다고해서 그것을 평생 즐기지 못하라는 법은 없다.
예를 들자면, 음식의 깊은 맛을 알아가는 것이 그러하다. 나물의 씁슬한 맛, 삭힌 음식의 깊은 맛 같은 것들은 훈련을 통해 알게되는 맛이다. 인간의 본성은 쓴맛과 삭힌 맛을 거부하는데, 꾸준히 먹어가며 입맛이 변하게 된다. 공부/책읽기/글쓰기 등등 몇가지 것들도 역시 그러한데, 본인의 취향을 알게 되기 까지는 훈련되고 익숙해지며, 알아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본인의 전공이나 직업을 선택하게 되는 과정 역시 그러하다.
아마도 부모의 역할은 그 과정에 조금 도움을 줄 수 있는 정도가 아닐까 싶다.
나와 부모님의 관계를 생각해본다. 나는 아직도 가끔 부모님께 이런저런 조언을 구할 때가 있다. 대부분은 부모님이 해결책을 제시할 수 없다. 이제는 부모님도 연세가 들어 빠르게 변하는 세상을 온전히 따라잡지 못하신다. 반면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은 예전보다 복잡해져서 설명하는데에만도 힘겨울 때가 있다.
그럼에도 나는 그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마음이 편해진다. 편안함은 그분들이 온전히 내편이라는데에서 온다. 내입장에서 생각해주신다. 나와의 관계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지 않는다. 온전히 신뢰할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때로 큰 힘이 된다.
부모로서 해줄 수 있는 중요한 일 중에 하나는 자식을 신뢰하는 것. 그리고 본인이 스스로 자신을 알아갈 수 있도록 지켜봐 주는 것이 아닐까한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관한 책들
칼럼을 길게도 비평했다. 내가 못마땅 했던 것은 칼럼이 질문을 던진 방식이었고 그에 대한 대답이었다. 사실 필자의 논지 자체는 공감하는 부분이 적지 않았다.
제인 오스틴을 전공한 저자의 책은 한국에도 번역이 되어있다. 미국에서도 꽤 반향을 일으켰다고 들었다. 미국식 엘리트 교육에 대한 저자의 통렬한 비판은 한국의 상황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그리고 저자는 에이미 추아의 <타이거 마더>에 대해서도 실랄하게 비판한다고 한다. <타이거 마더>는 저자와 대척점에 있는 스파르타식 아이 교육법에 대한 책이다.
에이미 추아는 중국계 이민 2세이다. 예일대 로스쿨 교수인데, 스파르타식 자녀 교육법으로 꽤 큰 파장을 불러 왔던 것으로 안다.
시간이 나면 두 책을 다 읽어 보고 싶다. 문제는 읽지 않은 책이 쌓이기만 한다는 거다.
시험관 아기 시술 후 냉동된 배아에 대한 도덕적 고민과 사례들
Fertility treatments give birth to dilemma for parents (the guardian)
Interesting article about pollen allergies
기사 링크: Why Are Pollen Allergies So Common?
꽃가루 앨러지 때문에 심하게 고생했던 적이 있다. 그래서 앨러지 관련 기사를 흥미롭게 읽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앨러지가 왜 생기는 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앨러지를 일으키는 물질은 유해하지 않다. 다만 우리몸의 면역체계가 유해하다고 판단할 따름이다.
왜 그런가에 대해 두가지 상반된 이론이 있는데, 하나는 우리 몸이 바이러스와 싸우고 있을 때, 앨러지의 원인이 되는 물질에 노출이 되어 그렇다는 설이다. 다른 하나는 현대인이 너무 깨끗한 환경에서 살기 때문에 면역체계가 균과 pollen을 구분하지 못한다는 설이다.
이유야 어찌되었든 화창한 봄날에 앨러지 때문에 나가 돌아다지지 못하는 건 곤욕스러운 일이다.
0. 4년 만에
4년은 짧지 않은 시간이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청소년이 대학 졸업반이 되는 시간이고, 군대를 두번 다녀올 수 있는 시간이다. 병장 만기 제대를 하고서 사회에 나왔을 때, 몹시 어색했었다. 늦잠을 마음껏 잘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세상이 무질서하게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여자 사람이 눈앞에 흔하다는 것도 이상했다. 늦잠을 자보리라 마음 먹었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6시가 되자 눈이 저절로 떠졌었다.
시차 때문에 일어나는 시간이 불규칙하다. 정신이 없다. 약간 멍한 상태로 가족/친구들을 만난다. 어떤 부분은 생소하고, 어떤 부분은 ‘아 그랬었지’ 싶다.
외국 여행과는 조금 다르다. 전혀 모르는 곳에 가면 모든 것을 새로 경험한다. 한국은 익숙한 곳이라, 생경한 느낌이 더 크다. 나도 변했고 한국도 변했다. 몇년 더 외국에 체류하면 한국을 잘 안다고 자신있게 말하기 어렵겠구나 싶다. 그렇다고 미국에 온전히 스며든 것도 아니니 약간은 서글프다.
두 주 정도 있으면서 느낀 점을 적어본다. 짧게 머물렀기에 나름의 가치가 있다. 좀더 있었다면 나는 다시 한국에 젖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느낀 이질감이 익숙함으로 변할 것이고, 나는 미묘한 차이를 더이상 느끼지 못할 것이다.
1. 공항에서 들어오면서
중국 자본이 한국에 공격적으로 들어오고 있다.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오면서 처음 본 광고판은 중국어로 되어 있었다. 交通銀行. 과거 삼성이 글로벌 브랜드를 키우려고 할 때, 제일 먼저 각국의 주요 공항 광고판을 장악하는 일부터 했다. 당시 한국인이 외국에서 애니콜 광고판을 보면서 느꼈던 뿌듯한 감정을 중국 사람들도 느낄런지 모른다.
2. 유행어
행복이라는 단어가 자주 보인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월드컵의 열기가 가득하던 2002년. 김정은은 비씨카드 광고에서 ‘부자되세요’를 외쳤다. 그리고 그시절 우리는 ‘부자 되세요’를 덕담으로 주고 받았다. 모든 유행어를 사회현상이라고 부르고 분석하려 드는 것은 때로 과도하다. 그러나 행복이라는 단어는 요즘 한국 사람들에게 적지않은 공감을 주는 단어인듯 하다.
3. 자극이 넘쳐나는 한국
무엇보다 한국 여기저기 넘쳐나는 자극이 인상 깊었다.
3-1. 간판
우선 간판. 한국 간판은 자극적이다. 간판이 건물과 어우러지지 않을 뿐더러 간판의 모든 글자는 강조되어 있다. 문서로 따지면 모든 글자에 견고딕체, 글자크기 40 pt, 굵은 글씨, 붉은 강조색, 밑줄치기를 사용한 느낌이다. 모든 글자를 강조를 하다 보니 아무 것도 강조되지 않는다. 이것은 옆가게 간판과 비교해도 마찬가지이다. 모두 원색적으로 튀려고 하니 서로 묻힌다. 간판들이 서로 돌출되어 아우성을 지르는 데,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다.
3-2. 지하철 광고
어디를 봐도 광고를 피할 수 없다. 다음 열차를 기다릴 때도, 열차안에서 고개를 잠깐 돌려도, 스크린도어가 열릴 때도 닫힐 때도 모두 광고이다. 소리부터 시선까지 광고를 피할 방법이 없다. 버스 안에서도 광고가 가득하고, 버스 밖에서도, 안내 방송을 들을 때도, 은행에서 순번을 기다릴 때도 광고는 피할 수 없다. 이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4년 사이에 일상 생활에서 광고 노출은 과하게 커졌다. 공해로 봐도 무방하다.
3-3. 뉴스
뉴스에 극단적인 표현이 넘쳐난다. 뉴스를 틀어 보았다. 몇분 사이에 뉴스에서 파란, 좌초, 파국, 충격 같은 단어를 수차례 들었다. 뉴스를 보고 있으면 (그냥 틀어놓고 배경음으로 들으면서도) 나라가 금방이라도 망할 것 같고,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역시도 정보가 아니라 공해다. TV조선이나 채널a는 말할 것도 없고, 공중파도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도 뉴스는 계속 된다. 그곳에는 한줄 짜리 단신이 나온다. ‘연봉킹’, ‘돌연’ 등등의 강조의 표현이 많아서 눈쌀이 찌푸려졌다. 간판을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는다. 모든 뉴스가 자기를 봐달라고 아우성을 치는데, 정작 보는 사람은 무관심해진다. 그럴 수록 컨텐츠 생산자는 더욱 자극적인 문구를 만든다.
3-4. 시위 구호
예전에 ‘결사항전’이라는 단어를 보고서도 유사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결사는 목숨을 걸고라는 뜻이다, 살면서 목숨을 걸 일이 몇개나 될 것인가. 물론 사안이 중요하기에 강조를 하는 것을 알겠지만, 너무 흔하게 듣다보니 가치가 떨어져 버렸다. 이제 진정 강조를 하려면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걸어야 할 판인데, 나는 목숨보다 소중한 것을 잘 모르겠다.
3-5. 음식
한국사람은 원래부터 자극적인 것을 좋아했던 걸까. 맵고 짠 음식을 즐긴다. 직설적이고, 거침없으며, 저돌적이다. 한국사회는 빠르게 변하고, 그 안에서는 자극적인 한방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한다. 이게 꼭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생존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3-6. 내가 변한 것일까, 한국이 변한 것일까
해외에서 사는 것은 외딴 섬에서 사는 것과 비슷하다. 내가 사람을 사귀는 데에 열심이 아니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싶다. 외국인들은 다른 사람에 별 관심이 없다. 외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가보면 속세를 떠나 산에서 도를 닦다가 도시로 내려온 사람이 된 것 같다. 그만큼 한국 사람들은 열심히 살고 피곤하게 사는 것 같다.
내가 언어에 좀더 민감해져서 일 수도 있다. 예전보다 단어 하나하나가 더 신경이 쓰인다. 영어 환경에서 한국어 환경으로 바뀌어 더욱 그런 것 같다. 어쨌든 나도 변했고 한국도 변했다.
4. 긍정적인 점
회식 문화가 달라졌다.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에 의하면, 이제는 이차/삼차로 가는 회식은 강요하지 않는 분위기다. 어떤이는 일부러 찾아다니지 않으면 회식 자리를 한달에 한번 이상 갖기 힘들다고 했고, 어떤이는 경비 절감때문에 회식비가 많이 줄었다고 아쉬워했다. 물론 회사/부서/상관에 따라 편차가 있다. 그래도 전반적인 분위기는 확실히 변한 듯 하다.
이러한 변화는 주류 소비 행태에도 영향을 미쳤다. 양주 시장은 예전만 못하다. 젊은 사람들은 가볍게 마시는 맥주나 도수가 약한 소주를 찾는다. 크래프트 비어도 열풍이고 맥주의 종류도 다양해 졌다. 나이든 어른신들은 건강에 좋다며 막걸리, 동동주를 찾는다.
남자의 육아휴직 사용도 꽤 활성화 되었다. 물론 자유롭게 사용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이제 주변에서 육아휴직을 사용하는 남성의 예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개인/가족을 더 자주 말하고, 조직은 예전보다 끈끈하지 않다. 사회가 점점 개인화되어 간다.
이러한 변화들은 내가 한국을 떠난 4~5년 사이에 일어난 것이다. 안에서 느끼기에는 변화가 느리게 보이지만, 밖에서 보기에 5년 사이에 일어난 변화로는 크다. 한국인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받아들이는 속도가 빠르고, 또 새것에 대한 저항이 작다.
한국인이 문제라고 말하고 있는 것들은 생각보다 빨리 개선된다. 그리고 5년 10년 후에는 한국사람들은 또다른 문제를 들고서 한국사람들은 이래서 안돼, 변해야돼, 외국을 봐봐. 라고 말하고 있을런지 모른다. 한국인은 놀랍도록 유능한 사람들이다. 세계 어디를 봐도 이정도로 빠르게 개선하고, 바꾸는 사람들은 없다.
그런 점에서 나같이 외국에 나와 있는 사람들은 몇년만 지나도 한국에 대해 안다고 말하기가 조심스럽다. 내가 알고 있는 한국의 이미지는 내가 한국을 떠난 순간으로 고정되어 있다. 한국은 오늘도 변하고 있다. 내가 이전의 경험에 근거해서 ‘한국은 이래서 문제다’라고 말한다면 그 문제는 이미 사라진 다음 일지 모른다.
5. 그외 사소한 것들
5-1. 대중교통
간만에 대중교통을 이용해보니 사람사는 것 같았다. 미국, 특히 내가 사는 곳은 대중교통망이 허술하다. 자동차를 항시 이용할 수 밖에 없다. 서울에서 버스/지하철/택시를 이용하다보니 사람들과 가까이 접촉하게 되고, 다양한 사람들을 볼 수가 있었다. 서울만의 매력이다.
5-2. 물리적인 접촉과 우측통행
한국은 서로 몸을 부딪히는 게 자연스럽다. 미국 사람들은 서로 간에 물리적인 거리를 둔다. 몸이 부딪히는 것을 극도로 조심하고, 알아서 서로 비켜준다. 좁은 복도에서 마주치면 우리는 곡예하듯 어깨만 살짝 돌려 피해가는데 반해, 미국 사람들은 넓은 곳에서도 상대가 지나가도록 멈추어 기다려 준다. 굳이 지나가야하는 상황이 되면 ‘Excuse me’라고 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또 얘네들은 우측통행이 생활화되어서,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오른쪽으로 몸을 피한다. 나도 알게 모르게 습관이 들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룰이 없어서 어색했다.
5-3. 비보호 좌회전
미국에서는 비보호 표지판이 없어도 대부분의 도로가 비보호 좌회전이다. 처음 미국에 왔을 때 그게 어색했는데, 이번에는 한국에 오니까 신호를 받고 좌회전을 하는게 어색했다.
5-4. 반디앤루니스 코엑스점 이전
2호선을 탈때면 삼성역에 내려서 반디앤루니스 코엑스를 들리곤 했다. 책을 살 일이 없어도 신간과 베스트셀러 코너를 주욱 둘러봤었다. 이번에 들렸을 때, 코엑스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반디앤루니스가 없었고, 대신 영풍문고가 들어와 있었다. 추억의 장소를 하나 잃었다. 나중에 들은 바로는 이전했다고 하는데, 시간이 없어서 가보진 못했다.
내가 이렇다.
미국에 있을 때는 한국에서 부대찌개를 먹으리라 생각해두고서, 막상 한국에서는 밥만 열심히 먹다가 돌아왔다. 이제 반찬이 없을 때, 스팸을 먹으면서 부대찌개를 또 생각하겠지.
마눌님아 빨리 돌아와 다오~
(지난달에 한국 방문 전에 썼던 스팸 관련 포스팅을 발견하구서…)
최근 스팸을 먹을 일이 많았다. 혼자 밥먹을 상황에서 스팸만큼 요리하기 편한 음식이 없더라.
외국 사람들에게는 한국 사람들의 스팸사랑이 신기한가부다. 작년에 BBC와 WSJ에서 한국사람의 스팸사랑을 뉴스로 다루더니 (BBC 기사 링크, WSJ 기사 링크) 어제는 NPR에서 다뤄주신다. 기사에 의하면 한국이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스팸을 많이 사먹는 나라라고 한다.
(image source: NPR)
In Korea, Spam Isn’t Junk Meat – It’s A Treat.
뭐, 먹는 거 가지고 저급하네, 세련되네 하는 건 무지의 소치이다. (제목과 달리 기사는 중립적인 톤을 유지한다.) 그치만 spam이라는 단어 자체가 spam mail의 어원이 될 정도로 싸구려 음식이라는 인식이 박혀있는 단어이다. Luxury까지는 아니어도 아직도 우리는 스팸을 선물로 주고 받는 것도 사실이고.
어찌 됐든, 기사보니까 갑자기 한국가서 부대찌개 먹고 싶네…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