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수다

며칠전에 지인과 페북에서 코맥 맥카시 수다를 떨었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나는 영화를 본적이 없었고, 넷플릭스에서 찜만 해두었었다. 내게는 ‘언젠가는 보려 했지만 선뜻 손은 안가는’ 그런 류의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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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친김에 넷플릭스에 들어가 보니 며칠안에 영화를 내린다고 했다. 나는 부리나케 영화를 봤다.

영화는 무겁고, 잔인하고, 불친절하다. 심지어 배경음악도 거의 없다. 그렇지만 워낙 몰입감이 쩔어서 보는 내내 숨죽이고 봤다. 나는 잔인한 영화를 좋아하지 않는데… (못 보는 건 아닌데, 굳이 불쾌한 경험을 찾아가며 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 킬러가 워낙 예측 불허라서 언제 사람을 죽일지 몰라 조마조마 하고 본 거 빼고는 그냥 볼만했다.

영화에 나오는 희대의 킬러 안톤 쉬거는 이해가 불가능한 존재이다. 동전 던지기는 그에게 죽음과 삶을 가르는 신성한(?) 의식이다. 잠깐 생각해봤다. 작가가 인생은 이해가 불가능하다, 그리고 삶과 죽음은 결정적으로 운에 달렸다는 메세지를 주는게 아닐까 싶었다.

어떠한 아이디어를 극단적으로 밀어부치면 그 아이디어에는 논리적인 구멍이 생기게 마련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 극단의 아이디어는 고유의 가치를 가지게 된다. 사람의 생과 사가 우연으로 결정된다는 하나의 아이디어는 지나치게 극단적이고, 그 아이디어를 존재 자체로 증명하는 쉬거는 공포와 혼돈이다. 영화에서도 그는 사람들에게 싸이코패스라고 불린다.

이건 다른 이야긴데, 나는 머리 속에서 공리주의의 벤담이 떠올랐다. 언젠가 한번 수다를 떨 기회가 있겠지만, 세상의 모든 가치를 공리 utility로 압축하고 숫자로 quantify할 수 있다는 그의 아이디어는 지나치게 극단적일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을 불쾌하게 한다.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이 아이디어가 근대 서양의 수많은 사상의 토대가 (특히 경제학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되었다는 건 아이러니다.

영화를 보고서 위키를 찾아 읽었다. 어떤 분들은 쉬거의 존재를 재앙으로 해석하더라. 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앙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이성적인 이해나, 논리적인 설명이 불가능 하다. 삶과 죽음의 문제 앞에서 이성과 논리가 무슨 힘을 가지고 있는가. 평생을 계획하고 성실하게 살아온 사람도 재앙의 방문에는 무력하다. 인간은 연약하고, 그럼에도 살아야하는 인생이 버겁다. 지인의 말처럼 (그리고 보완관 에드의 말처럼) overmatched이다. 극단적인 아이디어는 역시 극단적인 상황을 설명하기에 적절하다.

영화를 보며 한편으로는 내내 엘파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의 배경은 멕시코와 미국의 접경 도시 엘파소이다. 그리고 바로 며칠전 엘파소에서 백인 우월주의자의 총기 난사가 있었고 월마트에서 40여명이 죽거나 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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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알기로 엘파소가 그렇게 위험한 곳은 아니다. 그러니까 영화를 보고서 상상할 만한 그런 곳, 멕시코 갱단이 길거리를 활보하는 그런 곳은 당연히 아니다. 또 엘파소는 우리 트황상의 말만 들으면, 멕시코에서 건너온 범죄자들이 득실대고 총질과 마약거래를 보는게 일상인 동네일 것 같지만… 실상은 치안이 가장 좋은 동네 중 하나이다. 아무래도 군병력이 주둔한 곳이고 하다보니 오히려 안전한 동네가 됐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차로 10시간 걸려 댈러스에서 운전을 하고온 백인 우월주의자가 더 위험한 존재지.

국경지대라는 곳은 참 묘한 곳이다. 두개의 다른 국가의 정체성이 하나의 선으로 나뉘는 곳. 국가라는 정체성이 마찰을 일으키는 그곳 만큼 폭력을 상상하기 딱 어울리는 곳이 없다.

코맥 맥카시는 엘파소에서 20년을 살았다고 한다. 그는 핏빛 자오선,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말고도 국경 3부작을 썼는데… 그의 작품속에 그려진 폭력의 세계는 그 국경이라는 독특한 환경에서 자란게 아닐까 싶었다. 요며칠 그 폭력을 영화에서 그리고 뉴스에서 동시에 보았다. 영화처럼 현실도 불쾌하다.

폭력과 불평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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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평등 이슈 관련 책들이 핫하다. 피케티, 앳킨슨, 밀라노비치의 책들이 이미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관련한 책이 하나 더 나왔길래 이코노미스트지 북리뷰를 옮겨둔다. 따끈따근한 신간이지만 이분야가 요새 뜨거우니 한국에도 곧 소개되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The Economist | Violence and inequality: Apocalypse then (3월 2일자)

저자는 스탠포드대 고전학과 월터 샤이델 교수. 로마사 쪽 권위자라고. 책제목은 The Great Leveller 이다.

불평등 이슈에 대한 책을 볼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 진다. ‘그래서 결국 해결책은?’ 이라는 질문에 답이 없다. 맬서스의 인구론을 접한 19세기 사람들이 비슷한 심정이었을까.

코끼리 곡선으로 유명한 밀라노비치의 책도 대놓고 말을 하지 않았을 뿐, 종국에 해결책은 혁명이나 전쟁 같은 폭력 밖에 없다는 논리적 귀결을 품고 있다.

리뷰에 따르면, 이책은 아주 대놓고 인류 역사에서 평등을 가져왔던 사건은 대참사 밖에 없었다고 주장한다. 샤이델은 책에서 역사상 의미있는 평등을 가져왔던 사건을 네가지 종류로 나눈다. 바로 전쟁, 혁명, 국가의 붕괴, 전염병이다.

따져보면 말이 안되는 건 아니다. 이러한 관점으로 보면 1960년대 미국 황금기는 이차대전 이후 중산층의 탄생과 시점을 같이한다. 한국의 경우도 (동일한 관점으로 보자면) 한국전쟁 이후 완전한 폐허에서 한반도 역사상 본적이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룩했다. (아, 21세기 지금까지 그러한가는 역시나 관점의 문제이다.)

말이 되는 것과 별개로 너무나도 불편하다. 불평등 이슈는 팩트와 관점의 경계가 너무나도 희미해서 개개인이 가진 정치적, 역사적 시야를 온전히 제하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생각해보면 ‘세계는 불평등한가’ 라는 질문이 이미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나는 불평등 이슈의 무게에 너무 눌린 나머지, 질문 자체를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하는 막연한 느낌을 받는다. 그러나 이 질문이 현대인들에게 큰 공감을 가져온다는 것 또한 현실.

시위와 폭력에 대하여

NYT에 실린 Nicholas Mirzoeff 교수 (NYU media학과) 의 대담을 공유한다. 요약과 함께 내 생각이 섞여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원문을 참조할 것을 부탁드린다.

시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시위가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라는 보도를 자주 듣는다. 그 경우, 시위가 폭력적이다, 아니다의 기준은 시위과정에서 기물 파손이 있었는가, 시위대와 경찰 간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는가, 경찰이 물리력을 행사했는가에 있다.

그러나 시위에 있어서 폭력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주위에서 같은 뉴스 보도를 보고서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매일 보지 않는가. 왜 그럴까.

일반적으로 시민은 정부의 폭력에 대해서 관대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타당하다. 사회 계약의 관점에서 시민은 ‘보호’, ‘안전’, ‘치안’을 대가로 정부에게 폭력의 독점권을 양도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치안’유지를 위해 사회의 ‘안정’을 위해 규제를 하고 공권력을 행사한다.

시민들이 정부의 폭력 독점을 인지하는 시점은 정부의 정당성이 약화되었을 때이다. 대표적인 예로 ‘독재 정권’에 대한 시위와 ‘식민 정권’에 대한 항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도시락 폭탄 투척 사건을 보자.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이는 명백한 폭력이고 테러 행위이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 시민이나 일본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조선사람들은 이를 테러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지 않는 (나를 포함한) 현대의 한국인들은 윤봉길의 행위를 의거로 본다.

동일한 관점을 ‘민주화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부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시위대는 폭도들이고, 이를 진압하는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한 질서 유지 활동으로 읽힌다. 그 반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이미지가 이러한 상반된 시각의 대립과 균형(?)을 한번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를 테면 역사를 바꾼 보도 사진들이다. 대표적으로는 최근 시리아 난민을 주목하게 만든 Aylan Kurdi의 사진이 그러하고, 한국의 예로는 김주열의 주검사진 (또는 소문)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도 사진은 정치적이다. (여기서 나는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가치 중립적으로 사용했다.) 사진은 시선과 메세지를 담기 마련인데, 폭력의 독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피해자의 사진은 약자의 시선을 보여주고, 폭력을 독점하는 정부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정부의 폭력 독점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폭력 독점을 견제하는 대표적인 예는 미국 수정헌법 2조이다. 그리고 수정헌법 2조는 미국에서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석이 되고 있다.

나는 수정헌법을 둘러싼 논쟁의 옳고 그름과 이론적인 배경을 떠나서,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인 총기 소유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