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의 상인들, 국제무역의 시작, 그리고 동인도 회사 – 1498년 캘리컷

지난번 책소개에 이어서 Empire of Cotton 일부 요약해본다.

지난번 포스트 링크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 캘리컷을 발견(?)했다. 이후 국제 무역은 완전히 달라졌다. 포르투갈은 희망봉을 거치는 아시아 직항을 뚫었고, 이는 오스만 제국을 통하지 않고 유럽으로 후추와 면직물을 들여올 수 있다는 의미이다.

포르투갈이 먼저 아시아 루트를 개척했다. 이후 네덜란드와 영국이 아시아 무역에 뛰어들었다. 포르투갈이 서서히 쇠퇴하는 동안 네덜란드와 영국이 (joint stock company를 통해) 아시아 루트의 주도권을 잡았고, 네 차례 영란전쟁을 거치며 아시아 지역의 제해권이 어느정도 정리 되었다.

네덜란드가 (간신히) 인도네시아 지역의 후추를 지키는 동안 영국은 인도양을 손에 넣었다. 18세기에 이르면 영국은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의 무역을 독점한다. 특히 인도의 면직물 calico는 세계적인 경쟁력을 가진 특산품이었고 영국의 상인들에게 부를 가져다 준다.

구체적으로 영국의 무역로를 보자면 이렇다. 영국은 동인도회사를 통해 면직물을 독점으로 산다. 면직물을 동남아시아에 팔아서 향신료를 구입한다. 그리고 일부는 유럽 내수용으로 가져오고, 또 서아프리카에서 부족장들에게 팔고서 노예를 사온다. (물물교환)

그리고 그 노예는 남아메리카와 캐리비안의 플랜테이션에 투입된다. 그리고 그 플렌테이션에서 환금성이 높은 작물을 키운다. 설탕, 쌀, 담배, 염료를 재배하는데에는 대규모 인력이 필요하다. 유럽의 상인들은 아프리카의 족장들에게 면직물 (또는 총기)을 대가로 노예 사냥을 요구한다.

어쨌든 이렇게 인도산 면직물은 영국 무역의 중심이 된다. 1766년에 이르면 동인도 회사 수출의 75%가 면직물이다.

동인도회사가 수익을 올린 방식은 철저히 독점에 의존했다. 인도인들은 영국 동인도회사를 제외하고 자유롭게 물건을 팔 수 없었다. 수탈로 인도인의 수익 분배는 급감한다. 한 자료에 따르면 17세기 후반 면직물의 매출의 1/3을 먹었지만, 그 비율은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6%로 떨어진다. 한때 면직물 교역으로 번성했던 인도의 구자라트, 뱅갈지역은 빈곤한 도시로 전락한다.

사실 면제품이 가진 여러 장점에도 불구하고 유럽인들은 면화를 상당히 늦게 알게되었다. 유럽 기후는 목화재배에 적합하지 않다. 목화를 키우기에는 너무 춥고 습하다.

중세 시절의 유럽인들은 나무에서 솜이 자란다는 걸 믿지 못했다. 심지어 인도에 가면 나무에서 양이 자란다는 상상까지 했다. (아래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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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유럽인들 목화나무 상상도)

인도산 면직물이 서서히 보급되면서 유럽 상류층 사이에서 큰 인기를 끌게된다. 이전까지 유럽 섬유산업은 마직류천 (linen)과 양모가 전부 였다. 그런데, 인도산 면직물이 들어오면서 섬유 생산업자들은 큰 위협을 느끼기 시작한다.

애구 오늘은 분량 조절에 실패했다. 좀 길어져서 보호무역 내용은 다음으로 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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