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RACTURED LANDS: HOW THE ARAB WORLD CAME APART (NYT)

오늘은 아침 일찍 스타벅스를 들렸다. 일요일판 뉴욕타임스를 사려고.

지난 목요일 인터넷판 NYT에 아래 기사가 실렸는데, 앞부분을 재미있게 읽었다. 이라크 전쟁부터 지금까지 시리아, 이라크, 이집트, 리비아의 6명의 인물의 삶을 18개월 간 심층 취재한 특집기사이다.

뉴욕타임스가 이례적으로 4000단어가 넘는 기사를 통째로 특집으로 실었다. 종이신문으로는 일요일판으로 나온다고 하여 오늘 스타벅스를 들려 한부 집어들었다.

딱히 종이신문을 선호하는 것은 아니다. 잠깐 NYT 종이 신문을 구독한 적이 있었는데, 쌓여가는 신문지만큼 마눌님의 구박도 쌓였었다.

그래도 종이 신문은 평소 관심없던 분야도 제목이라도 눈으로 훑게 되는 장점이 있다. 주말판에 실리는 북리뷰, 여행, 문화면도 소소한 재미가 있다.

문제는 원래 읽으려했던, 중동 심층 취재 기사. 막상 신문을 사고나니 기사를 읽고 싶은 마음이 급격히 약해져 버렸다. 이건 책을 산 다음에 목차와 머리말을 읽고나면, 자꾸 다른 책에 눈길이 가는 현상과 비슷하다. 그러니까 최근에 깨닫게 된 사실인데, 책을 읽지 않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그 책을 확 사버리는 것이라고나 할까.

시위와 폭력에 대하여

NYT에 실린 Nicholas Mirzoeff 교수 (NYU media학과) 의 대담을 공유한다. 요약과 함께 내 생각이 섞여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원문을 참조할 것을 부탁드린다.

시위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 ‘시위가 폭력적으로 돌변했다.’ 라는 보도를 자주 듣는다. 그 경우, 시위가 폭력적이다, 아니다의 기준은 시위과정에서 기물 파손이 있었는가, 시위대와 경찰 간에 물리적 충돌이 있었는가, 경찰이 물리력을 행사했는가에 있다.

그러나 시위에 있어서 폭력성을 판단하는 기준은 개개인에 따라 다르다. 주위에서 같은 뉴스 보도를 보고서도 다르게 해석하는 사람들을 우리는 매일 보지 않는가. 왜 그럴까.

일반적으로 시민은 정부의 폭력에 대해서 관대하거나 인지하지 못한다. 그것은 타당하다. 사회 계약의 관점에서 시민은 ‘보호’, ‘안전’, ‘치안’을 대가로 정부에게 폭력의 독점권을 양도했기 때문이다. 정부는 ‘치안’유지를 위해 사회의 ‘안정’을 위해 규제를 하고 공권력을 행사한다.

시민들이 정부의 폭력 독점을 인지하는 시점은 정부의 정당성이 약화되었을 때이다. 대표적인 예로 ‘독재 정권’에 대한 시위와 ‘식민 정권’에 대한 항거가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도시락 폭탄 투척 사건을 보자.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의 사람들에게 이는 명백한 폭력이고 테러 행위이다. 당시 대다수의 일본 시민이나 일본의 제국주의를 지지하는 조선사람들은 이를 테러 행위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그러나 일본 제국의 정당성을 지지하지 않는 (나를 포함한) 현대의 한국인들은 윤봉길의 행위를 의거로 본다.

동일한 관점을 ‘민주화 운동’에도 적용할 수 있다. 정부의 정당성을 지지하는 입장에서 시위대는 폭도들이고, 이를 진압하는 정부의 공권력은 정당한 질서 유지 활동으로 읽힌다. 그 반대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을 것이다.

때로는 이미지가 이러한 상반된 시각의 대립과 균형(?)을 한번에 무너뜨리기도 한다. 이를 테면 역사를 바꾼 보도 사진들이다. 대표적으로는 최근 시리아 난민을 주목하게 만든 Aylan Kurdi의 사진이 그러하고, 한국의 예로는 김주열의 주검사진 (또는 소문)이 있을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도 사진은 정치적이다. (여기서 나는 정치적이라는 단어를 가치 중립적으로 사용했다.) 사진은 시선과 메세지를 담기 마련인데, 폭력의 독점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피해자의 사진은 약자의 시선을 보여주고, 폭력을 독점하는 정부의 ‘폭력성’을 그대로 드러내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정부의 폭력 독점을 반대하지는 않는다. 정부의 폭력 독점을 견제하는 대표적인 예는 미국 수정헌법 2조이다. 그리고 수정헌법 2조는 미국에서 총기를 소유할 권리를 보장한다고 해석이 되고 있다.

나는 수정헌법을 둘러싼 논쟁의 옳고 그름과 이론적인 배경을 떠나서, 폭력의 극단적인 형태인 총기 소유의 자유를 법적으로 보장하는 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는지 현실을 직접 체험하고 있기 때문이다.

She Swam to Escape Syria. Now She’ll Swim in Rio – NYT

잊고 있었는데, 올림픽이 코앞이다.

어제 재미있게 읽은 기사가 있어 공유한다. 시리아 난민 Mardini 이야기. 그녀는 시리아를 탈출할 때 지중해를 수영했고, 이제 리우에서 수영을 할 것이다.

리우올림픽에는 난민팀이 따로 구성된다고 한다. 시리아, 남수단, 콩고, 에디오피아 난민들이 그 대상. Mardini는 이번에 난민팀으로 출전한다.

내전이 일어나기 전, 시리아는 중동에서는 비교적 평화로운 국가였다. 그리고 Mardini는 수영밖에 모르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2011년 전쟁이 나고, 이어 2012년 그녀가 사는 Daraya에 대학살이 벌어진다.

가디언 기사: Syria’s worst massacre: Daraya death till reaches 400

그녀 가족은 망명을 결심하고, 지중해를 건너기로 한다. 배를 구했다. 6명 정원 구명보트에 20명이 탔는데, 바다 한가운데서 엔진이 죽어버렸다. 배에서 유일하게 수영을 할 줄 아는 그녀와 동생이 세시간 반동안 지중해를 수영해서 터키와 그리스 경찰에게 구조를 요청한다. (원래는 수영이 가능한 다른 두 청년이 더 있었는데, 포기하고 배를 떠났다고.) 그녀는 수영 선수라 수영하다 죽는구나 싶었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에 도착한 그녀는 같이 훈련했던 친구가 올림픽에 출전한다는 소식에 다시 수영을 시작했다. 그리고 refugee team이 되어 이번 올림픽에 출전하게 된 것.

그녀의 인터뷰 중에 인상깊었던 부분을 옮겨본다. 시리아에 있을 때, 친구들과의 이야기다.

그러나 그녀의 친구들 세계에서 대부분의 일상은 평소와 다를바 없었다. “우리는 전쟁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어요. 짜증나거든요. 처음에는 모두들 전쟁 이야기를 했죠. 나중에는 아무도 그 얘기를 안했어요. 대신에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죽을테면 죽으라지. 나는 그냥 내 삶을 살꺼야. 난 그냥 친구들하고 노는 게 좋아.”

전쟁 중에도 사람들은 일상을 살아간다. 시리아 내전도 이미 6년 째이다. 최근에 본 9분 짜리 PBS 동영상이 하나 생각났는데, 아울러 링크를 걸어둔다.

World’s largest Syrian refugee camp has developed its own economy (PBS, 6월 18일자)

동영상은 요르단에 설치된 시리아 난민 캠프 이야기다. 전쟁이 오래 갈줄 몰랐기에 임시(?)로 난민 캠프가 설치되었는데, 지금은 8만명의 시리아인이 거주하는 일종의 소도시가 되었다. 그곳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자연스레 도시의 기본 기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빵굽는 사람, 이발사, 학교들이 생겼고, 소규모 경제활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니, 한국도 피난민들이 모여서 부산에 깡통시장이 생기고 국제시장이 커지지 않았던가. 전쟁통에도 평범한 사람들은 어찌저찌 살아가지 싶다. Mardini에게는 수영이 그 평범한 삶 중 하나였으리라.

버니를 외치는 사람들

그저께 (7/26) 페북에 올린 글을 저장함.


 

민주당 전당대회가 어제 시작되었다. 공화당 전당대회와 달리 심심하게 가지않을까 하는 건 나의 기우였다. 첫날부터 뜨겁다. 어제의 주인공은 버니 샌더스 의원.

어제만 놓고 보면, 전당대회의 주인공은 힐러리가 아니고 샌더스이다. 몇몇 사람들은 전당대회당에서 버니를 지지하는 피켓을 들고서, 버니 이름을 외쳤고 심지어는 힐러리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야유(!)를 퍼부었다.

첨부한 동영상은 전당대회 오전 포럼에서 샌더스가 지지자들에게 힐러리를 지지할 것을 부탁하는 장면이다. 열혈 샌더스 지지자는 울기도 하고, 힐러리 이름이 나오면 ‘Boo’를 외치며, ‘We want Bernie!’를 외친다.

어제의 하일라이트는 마지막 순서인 샌더스의 연설. 나는 중계방송을 지켜보았는데, 샌더스 지지자의 열기에 깜짝 놀랐다. 샌더스가 단상에 오르자, 관중의 함성이 극에 달했고, 몇분 동안 (시간을 안재봤는데 정말 길게 느껴졌다) 그 함성에 샌더스는 연설을 시작하지도 못했다.

샌더스 의원은 힐러리와 노선이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지만, (대표적으로 자유무역을 반대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트럼프가 당선되는 일이 없어야 한다고 이야기했고, 인권과 환경문제에 있어서 힐러리와 견해를 같이한다고 했다.

형식상 샌더스 의원의 힐러리 지지 선언으로 민주당 경선이 마무리를 지어졌다. 그러나 열성 버니 지지자들은 여전히 힐러리에 반발하고 있고, (그들은 힐러리가 전쟁광이며 부패한 정치인이라고 말한다.) 샌더스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다.

2016 미국 대선 관련 포스트
버니를 외치는 사람들 (7월 28일 포스트)
테드 크루즈와 마이크 펜스 (7월 21일 포스트)
2016 미국 대선 업데이트: 트럼프는 뭘 하고 있을까? (6월 24일 포스트)
힐러리, 트럼프 공격의 포문을 열다 (6월 4일 포스트)
힐러리 vs. 트럼프 지지율, 이메일 스캔들 (5월 28일 포스트)
Why Is Clinton Disliked? (NYT) (5월 25일 포스트)
최근 미국 뉴스 정리 및 간단한 커맨트 (2016/05/23)
Democracies end when they are too democratic (New York Magazine) (5월 19일 포스트)
Healthcare, again (5월 17일 포스트)
트럼프와 모순의 힘 (5월 12일 포스트)
공화당 경선 정리: 트럼프와 크루즈 (5월 6일 포스트)
미국 민주당 싸움 이야기 업데이트 (4월 7일 포스트)
미국 민주당쪽 이슈 관련 기사모음 (3월 21일 포스트)
미국의 정체성과 도널드 트럼프 (3월 16일 포스트)
아이오와 코커스 감상 (2월 2일 포스트)
공화당 선거 스케치 – 테드 크루즈 편 (2015년 12월 23일 포스트)
미국식 네거티브 선거 (2015년 10월 20일 포스트)
한편 민주당에서는… : 샌더스와 바이든 (2015년 9월 14일 포스트)

브렉시트 연재: 3.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오늘 포스트에서는 브렉시트를 통해 불평등 이슈를 생각해보려한다. 말하자면, 대중은 왜 엘리트 정치인(또는 기성정치인)을 불신하고 트럼프나 보리스 같은 사람들을 지지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나는 지금까지 브렉시트에 대한 생각정리를 하면서 주로 EU의 꿈 vs. 대영제국의 꿈이라는 관점에서 포스팅을 해왔다.

나는 브렉시트를 Eurosceptic의 성과라는 관점에서 읽는다. 그러나 Eurosceptic이 (경제적으로는) 불평등 이슈와 (사회적으로는) 반이민정서에 기대고 있다라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게다가 지역적인 EU 이슈와 달리 불평등 이슈는 전세계가 다같이 겪는 문제이기에 우리에게는 오히려 가깝게 다가온다.

생각을 이어가기 위해, 어제 읽은 기사 중에서 하나를 인용 한다.

기사는 작년 9월 ‘사이언스’지에 발표된 실험에 주목한다. 이 실험은 최근 행동경제학쪽에서 주목받고 있는 레이먼드 피스먼 교수가 주도했다. (자세한 내용은 논문 참조: 링크) 실험은 dictator game을 살짝 바꾼 형태이다. (Dictator game에 대해서는 링크 참조: 한글 블로그, 영문 위키피디아)

Dictator game은 경제활동이 개개인의 논리적인 이윤추구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피스먼 교수의 실험은 이를 조금 바꾸어서, 경제활동을 할 때 사람들이 효율성과 공평함 둘중에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들이 파이를 키우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효율성의 관점) 아니면 파이가 작아지더라도 공평하게 나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 (경제적 평등의 관점) 에 대한 질문이다.

실험 참가자들에게 실제 돈을 주어주고서 (정확하게는 현금등가물) 나누면 나눌 수록 전체 금액이 줄어드는 상황을 제시한다. 그리고 전혀 나누지 않더라도 모두에게 일정부분의 돈은 돌아가게 되어 있다.

결과가 흥미롭다. average American의 경우는 절반 정도가 효율성보다는 공평함을 선택했다. 그러나 예일대 법대 생의 경우는 80% 정도가 효율성을 더 중요시 여겼다. 그리고 UC버클리 학부생은 그 중간 정도이다.

피스먼 교수의 결론은 이렇다.

“엘리트 위치에 있는 사람들일 수록 효율성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시스템이 그 사람에게 호의적일 수록 배분의 문제에 덜 걱정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자유무역’ 이야기를 해보자. 최근 미국 정치권은 큰정부 vs. 작은 정부에 대한 논쟁 보다는 ‘자유무역’ 논쟁이 더 치열하다. 심지어 데이비드 브룩스는 자유무역 찬반을 기준으로 향후 정치권이 재편될 것을 예상할 정도이다. 대표적으로 트럼프와 샌더스는 경제 공약으로 ‘보호무역’을 들고 나왔다.

여론조사를 봐도 ‘보호무역’ 선호가 뚜렷하다. 최근 Brooking Institution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52%의 미국인이 무역은 경제에 악영향을 끼친다고 답변을 했다.

캡처

영국의 경우를 보면 브렉시트파는 엘리트가 말하는 무역이익, 즉 EU와의 무역으로 생기는 이익은 믿지 못하겠으며, 그보다는 EU 분담금이 더 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자유무역’에 대한 경제학자들의 관점은 분명하다. 경제학에서 ‘자유무역’이 상호간에 이익이라는 것은 기본 지식에 속하며 이론적으로도 탄탄한 토대를 가지고 있다. 효율성을 기본 원리로 두고 있는 경제학에서 이것은 너무나도 자명하다.

TPP를 예로 들어보자. Peterson Institute for International Economics의 보고서에 따르면, TPP는 2030년까지 미국의 소득을 $131B을 늘일 것이라고 한다. 미국 GDP의 0.5%이다. 경제에서 0.5%는 엄청난 숫자다. 협정하나로 가져올 수 있는 이득으로 보자면 말이다. 그리고 53,700개의 일자리가 없어질 것이라고 덧붙인다. (물론 그만큼의 일자리가 더 생길 것으로 전망한다. 그러니까 순증가량으로 보면 일자리가 오히려 늘어난다.)

매해 6천만명의 사람들이 이직을 하는 미국에서 5만명은 정말 작은 숫자다. 그러나 그 5만명에게는 생계가 달린 일이다. 그리고 TPP가 진행되면 그들과 그 가족/친척들은 가장 강력한 트럼프 지지자가 될 것이다.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소수의 사람을 위해서 경제발전을 포기하란 말인가. 현실적으로 정책결정자 누구도 그러한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게다가 포기의 결정이 옳다고 말하기도 힘들다.) 그러나 브렉시트와 트럼프 현상을 진지하게 보다보면, 과연 그러한 견고한 모델이 옳은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이제 글을 마무리 지어보자. 내가 이글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생각을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나에 대해 잘 이해하기 위함이다.

공학/경영학의 세례를 받은 나는 효율성 중심으로 사고하는 것이 익숙하다. 물론 내가 엘리트라고 느낀 적은 없지만, 최소한 시스템에 어느정도 적응을 하며 살아왔다. 돌이켜 보건데 내가 지금까지 시스템에 우호적인 생각만을 하면서 살고 있지 않았나 하는 의심을 하게 되는 요즘이다.

+ 덧: 미국을 기준으로 많은 예를 들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자면, 브렉시트와 ‘자유무역’을 동일 선상에 놓는 것에는 논리적인 비약이 있다. 오히려 영국은 항상 자유무역을 옹호해왔다.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일부 (특히 지식인 층에서) 영국인들은 영국이 EU의 테두리를 벗어나서 비EU 국가와 더 많이 교류할 것을 기대하고 있다. 그러나 브렉시트를 선택한 대다수의 저소득 영국인들은 영국과 EU와의 무역으로 얻는 이득을 믿지않았다. 나는 브렉시트가 영국을 더 적극적인 ‘자유무역’ 국가로 만들 것이라는 전망에는 회의적이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브렉시트 연재: 2.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Vox기자 Amanda Taub의 NYT 기고문을 공유한다. 언제나 그랬듯이, 간략하게 정리하고 내 생각을 덧붙이려 한다.

지난주 영국에 초점을 맞추던 외신들이 이제 EU 내부의 문제를 조명하는 분위기이다.

Euroseptic, 즉 EU에 대해서 비관적인 견해를 표명하는 사람들이 한 목소리로 이야기 하는 것은 EU가 비민주적이며, 각나라의 주권을 침해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프랑스 국민전선의 르펜이나, UKIP의 패라지, 그리고 이번 브렉시트를 이끈 보리스 존슨이 대표적인 Euroseptic이다.

.

.

이들을 극우 포퓰리스트로 보는 것은 일리가 있는 평가이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들을 때마다 Euroseptic에서 중요한 한 부분을 놓치는 듯한 찜찜함이 남는다.

개별국가의 시각에서 EU를 바라보면 EU는 대단히 비민주적으로 작동한다. 영국을 예를 들자면,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들 (이를테면, 그리스를 구제하는 문제에 있어서나 이민자들을 받아들이는 문제들…)에 대해 정작 영국사람들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는다.

민주주의는 결과보다 그 과정이 더 중요하다. 영국사람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의사결정을 영국사람이 하겠다는 요구는 정당하며 지극히 근본적인 문제제기인 것이다.

정치는 이해관계가 상충될 때, 어떻게 의사 결정을 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선거를 통해 대표자를 뽑고, 이익단체를 통해 목소리를 내고, 미디어와 공론장, 그리고 국회에서 논의를 하는 과정 자체가 바로 민주주의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은 경우에는 청원서를 접수하거나, 헌법소원을 하거나, 아니면 시위에 참가하거나, 이런 행위들은 모두 정상적으로 민주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EU는 그런식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앞에서 말했듯이 심지어는 영국민 자신에게 중요한 큰 결정에 마저 그러하다.

European Parliament

.

위에 첨부한 기사로 돌아와서, 그렇다면 왜 EU는 비민주적인 방식을 고집하는 것일까?

첫째, EU는 원래 그렇게 작동하도록 고안되었다. 유럽의회의 구성원들은 선거로 선출하지만, 기본적으로 그들은 technocrat, 즉 전문가 집단이다. 그들은 개별 국가의 이익을 대변한다기 보다는 EU 관점에서 최적의 결정을 할 것을 요구 받는다.

EU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럽의 평화와 공존, 그리고 하나된 유럽이다. 하나의 유럽이라는 이상과 개별국가의 이익은 상충되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특히나 유럽이 그렇게도 두려워하는 파시즘이나 민족주의자들의 봉기는 더더욱 그러하다. EU의 전문가 중심의 의사결정은 이러한 목적에 잘 부합한다.

기사는 두번째로 EU의 지나치게 약한 권력을 지적한다. (헤깔리기 쉽지만, 강한 권력이 아니다.) 유럽 난민 문제를 예로 들어보자. EU는 각 나라에 난민 수용을 강제로 배정할 수 없다. 유럽의회에서 협의를 거친 이후, 각 나라와 다시 협상하고, 부탁하며, 양해를 구해왔다. 유럽 각국은 문제의 심각성을 인지하면서도 자기 나라가 떠안기는 거부하고 서로 모른척해왔다. 그리고 그 협상의 결과에 대해 개별 국가들은 모두 불만을 가지고 있다.

유럽연합과 각국의 힘의 균형에 대해서는 지난번에 포스팅한 바 있다. European Union을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비교해서 설명하자면, 유럽연합과 각국 정부는 미국의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관계와 유사하다.

미합중국도 건국초기에는 연방정부의 힘이 약했다. 미국은 역사적으로 주정부와 연방정부가 서로 견제하면서 성장해 왔다고 봐도 무방하다. 서로간의 대립이 가장 치열했을 때가 남북전쟁이다. 남북전쟁을 기점으로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한이 극대화된다. 연방을 탈퇴하면 전쟁을 불사한다는 것보다 더 강력한 메세지가 어디있겠는가.

Webster's_Reply_to_Hayne

Nullification Crisis

.

지난번 포스팅에서도 언급했지만, 미국의 연방주의자들이 강한 연방정부를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된 유럽, 그리고 강력한 유럽 연합이 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브렉시트 이후, EU는 개혁이 불가피해졌다. 좀더 강력한 EU를 추구하던지 (강력한 EU는 우선은 UK에 대한 강경대응의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아니면 어떠한 식으로든 민주적인 의사 결정 절차를 추가해야 할 필요가 있다.

기사에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개인적으로는 한가지 의문이 남는다. 대의 민주주의의 한계, 그리고 엘리트 정치인들과 대중의 괴리이다. 브렉시트 과정에서 영국의 양당은 모두 EU 잔류를 내걸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엘리트 정치인을 불신했다. 사실, 카메룬의 협박(?)은 결론만 보면 틀린말은 아니였다. 그가 말했듯이 Exit을 선택하는 것은 영국민의 선택이지만, 그 와중에서 생기는 사회/정치적인 혼란, 경제적인 부담은 온전히 국민의 몫으로 남게되었다. 그러나 영국 사람들은 기성정치에 불만 표시로 브렉시트를 선택하였다.

EU가 태생적으로 민주적이지 않은 것 또한 EU 본연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듯이, 엘리트 정치인들이 포퓰리즘에 우려를 표하는 것 또한 나름의 당위성이 있다. 사실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은 영국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트럼프와 샌더스의 부상 또한 기성정치에 대한 불신의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브렉시트 연재: 1.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요즘 뉴욕타임스에는 브렉시트에 대한 유력인사들의 기고문이 이어진다. 그제는 프랑스 마린 르펜의 기고문이 있었고, 어제는 샌더스의 기고문이 올라왔다.

특정 사건에 대한 정치인의 논평을 들을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사건 그자체의 의미를 곱씹는다기 보다는 평소에 자신이 주장하던 이야기의 연장선상에서 사건을 재해석한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를 테면, 샌더스 의원의 경우는 브렉시트에서 99퍼센트의 평범한 사람들의 분노를 읽는다. EU와 UK 엘리트 정치인들에 대한 보통사람들의 분노가 브렉시트를 이끌었다는 입장이다. 다만, 샌더스는 그들의 분노가 반이민 정서에 기대고 있는 부분은 우려를 표한다. 샌더스가 트럼프와 자신을 구분 짓는 지점이 바로 이민 이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NYT 기고문에서 ‘자유무역’에 반대하고 ‘공정무역(?)’에 찬성한다는 본인의 입장을 분명히 한다. 그리고 브렉시트를 계기로 전세계 민주주의자들이 연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국민전선 르펜 역시 기고문에서 브렉시트를 통해 평소 자신의 주장을 반복한다.

르펜은 기고문에서 브렉시트가 EU의 무능과 독일 중심의 유럽질서에 반기를 든 용기있는 결정이라고 평했다. 하나의 유럽의 꿈은 환상에 불과하고 유럽국가들은 관료주의적인 EU에서 탈출하여 독립주권 행사와 진정한 자유를 선택해야한다고 말한다.

나는 샌더스와 르펜의 주장에 대해 평하기보다는 요새 내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주제를 하나만 언급하려고 한다. (이것도 위 두사람처럼 내 관점의 연장선상으로 개별 사건을 보는 오류를 범하는 일이리라.)

그것은 미합중국 초기의 역사중에 연방주의자와 반연방주의자의 갈등이다. 물론 European Union을 United States of America와 동일한 기준으로 놓고 보는 것은 상당히 무리가 따르는 일이다. 그러나 최소한 과정상의 진통에서는 어느 정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미국은 건국 초기부터 지금까지 연방정부와 주정부의 갈등 속에서 성장해왔다. 우리에게야 연방이라는 개념이 쉽게 와닿지 않지만, 그리고 현대의 미국은 연방정부의 권력이 상당히 강해져서 하나의 나라라는 느낌이 더욱 크게 다가 오지만, 미국이 처음부터 그러했던 것은 아니다.

미국의 헌법을 보면 주정부의 권한과 연방정부의 권한을 미묘하게 조정하는데에 꽤 큰 노력을 들여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대표적으로 주정부는 이론적으로는 연방정부의 결정을 거부할 수 있는 nullification이라는 법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 (nullification 영문 위키피디아 링크)

Nullification이 정점에 달했던 시점은 앤드류 잭슨이 대통령이던 시절 사우스 캐롤라이나의 관세법 거부 사태였다. 당시 잭슨 대통령은 군대를 끌고 가는 가장 과격한 방법으로 주정부의 권한을 짓밟는다. (1833년) 그리고 그는 이런 말을 남긴다. ‘관세는 구실이고, 진짜 목적은 미합중국 해체와 남부연방의 설립이다. 다음에는 노예제를 구실로 삼을 것이다.’ (영문 위키 피디아 nullification crisis 항목 재인용) 이를 브렉시트로 바꾸어 말하면, ‘EU 분담금과 이민 문제는 구실이고, 진짜 목적은 EU의 해체와 대영제국의 재건이다.’ 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Webster's_Reply_to_Hayne

Nullification Crisis (image source: wikipedia)

.

앤드류 잭슨의 무력진압은 결과적으로는 남부 주정부들과 연방정부의 갈등을 키우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보자면, 30년 뒤에 일어난 남북전쟁을 노예해방이 아니라 nullification이 전쟁의 형태로 표현되었다고 읽을 수 있다.

브렉시트가 여러가지 경제 이슈 (특히 영국의 EU 부담금)와 이민 이슈 (표면상으로는 NHS 혜택), 그리고 (세대간, 지역간) 불평등 이슈들이 엮여서 발생한 것은 맞다. 그렇지만 독일 중심의 EU 체제를 거부하는 영국인의 자존심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초기 미국의 연방파 반연방파와의 갈등에서 유사점을 볼 수 있다.

미국 연방주의자가 주장했던 것처럼 하나된 유럽이 정답이라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EU라는 것도 어찌 보면 오랜 기간 치고 받은 유럽이 생각해낸 하나의 꿈이다. 게다가 미국은 역사와 전통이 없는 진공상태에서 탄생한 나라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원주민을 내쫓고 인공적인 진공상태를 만들었지만…) 반면, EU는 길고긴 역사와 상이한 문화적 전통을 가진 나라들의 집합체이기에 같은 기준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따른다.

다만 현시대를 사는 내가 바라보기에는, 엘리트들이 (정치인, 경제학자, 사상가 등등… ) 서로 다른 가치관과 꿈을 추구하고 치고 받는 과정에서 고통받고 경제적 부담을 짊어가야 하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라 안타깝다. 그리고 그 꿈들이 그만한 가치가 있느가하는 의문이 남는다.

브렉시트 관련글 모음

1편: European Union과 United of States of America
2편: 브렉시트와 EU의 정체성 – Eurosceptic의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3편: 브렉시트와 불평등의 문제 – 경제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4편: 브렉시트와 반이민 정서, 그리고 코스모폴리탄 – 사회 관점에서 본 브렉시트

2016 미국 대선 업데이트: 트럼프는 뭘 하고 있을까?

지난달 공화당 후보 확정 직후, 지지율에서 힐러리를 턱밑까지 따라잡았던 트럼프가 요즘은 조용하다.

그사이 힐러리는 민주당 후보 자리를 확정짓고 트럼프와의 지지율 격차를 6%p 까지 벌려 놓았다. (어제 일자 NYT 기사 기준, 아래 첨부) 첨부 기사는 스윙스테이트별 지지율도 분석하고 있으니 관심있는 분은 참고하시길.

Capture

최근 대선 관련 기사들을 보면, 트럼프 측은 선거자금 문제를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미국 선거는 돈잡아먹는 걸로 유명한데, 2012년 대선을 예를 들자면 오바마와 롬니가 각각 $1B을 썼다. 우리돈으로는 1조원이 넘는 금액이다. 트럼프가 아무리 부자라고 한들 자기돈으로 버티는 것은 경선까지가 한계이다.

선거자금을 말고도 트럼프 캠프는 여러모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요즘 트럼프는 스윙스테이트를 방치하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이다. 예를 들자면, 어제 그는 뉴욕에서 연설을 했다. 사실 뉴욕은 확실한 민주당 지역이기에 general election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곳이다.

내가 선거 전문가는 아니지만, 선거자금에 문제가 있어 광고를 집행하는데에 제약이 있다 하더라도, 바로 옆에 있는 펜실베니아를 공략하는 것은 크게 돈이 드는 일은 아니다. 펜실베니아는 스윙 스테이트이고, 뉴욕에서 버스로 이동 가능하며, 백인 블루칼라 계층이 많은 곳이다. 펜실베니아를 놓치면 트럼프는 그다지 승산이 없다. (트럼프가 많이 뒤지고 있는 상황을 감안하면)

어쨌든 현재 상황을 정리하면, 트럼프가 공화당 기축 세력과 티격태격 (지난주 인종차별 발언으로 폴라이언과 설전을 벌였다), 그리고 캠프 내에서 잡음으로 옥신각신 하는 동안, (이번주 트럼프는 캠페인 매니저 Corey Lewandowski를 해고했다.) 클린턴은 한걸음 도망가서 한숨 돌리고 있는 모양새다.

예전에 트럼프가 힐러리를 1%p차로 따라 잡았을 때도 사실은 아직 트럼프가 많이 뒤진다는 포스팅을 한적이 있었다. (이전 포스트: 힐러리 vs. 트럼프 지지율, 이메일 스캔들) 트럼프 측이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서 갈길은 아직 먼데, 이런저런 일로 시간을 낭비하는 것 같아서 좀 의아하다.

One of Us by Asne Seierstad

어제 올랜도 참사는 내게 큰 심리적 충격을 남겼다. 뉴스를 보는게 너무 피로하고 지친다. 주말이라 회사 일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집에서 딱히 할 일도 없다. 일이 있으면 뉴스를 외면하기가 더 쉬웠을 텐데…

그래서 책을 펴들었다. 예전부터 읽으려고 사두었던 ‘One of Us’ 이다. 이 책은 노르웨이 혐오범죄를 다룬 르포타쥬이다. 이 사건은 올랜도 참사와 많은 점이 닮았다. 2011년 7월 22일 오슬로에서 32세 청년 아르네스 베링 브레비이크는 ‘모든 막시스트를 죽이겠다’고 하면서 노동당 청소년 summer camp를 습격한다. 수제폭탄, Ruger Mini-14, 글록 권총으로 중무장한 그는 청소년 77명을 살해하는 끔직한 범행을 저지른다. 그는 자신이 기독교 근본 주의자라고 주장했고, 노르웨이에서 무슬림을 추방하고, 페미니스트와 사회주의자를 죽여야한다고 했다.

올랜도 사건 보도에서 도망쳐서 왜 유사한 노르웨이 사건을 읽기 시작했을까? 잘 모르겠다. 혐오범죄, 테러 범죄를 더 알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게 생겼는지도.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뉴스를 듣는 거 보단, 마음이 정돈된다.

‘One of Us’는 2015년 NYT 선정 best 10 book 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어떤 이들은 르포타쥬의 masterpiece로 평하기도 한다. 기자이기도 한 저자 Asne Seierstad는 사건과 관련된 모든 사람과 인터뷰를 하고 기록을 검토했다고 한다. (정작 범인은 인터뷰를 거절했다.) 그리고 범인의 출생부터 법정 공방까지는 세세하게 기록으로 남긴다. 심지어 책에는 사제 폭탄의 제조 과정, 범인이 칩거하면서 World of Warcraft에 빠져드는 과정이 구체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씌였기에 논픽션 소설로 분류 될 수 있을 듯 하다. 비슷한 장르의 ‘In Cold Blood (냉혈한)’ (트루먼 카포티 작) 가 떠오른다. 실제 사건에 기반했지만, 책은 범죄소설의 플롯을 따른다. 사건이 끔찍하기 때문에 호러 소설을 읽는 것 같기도 하다. 차분한 서술이 오히려 공포감을 자아낸다. 첫장면부터 몰입감이 대단하다. 그리고 종종 이 사건이 실화라는 사실이 떠오르는다. 책을 읽는 중에 미국에서 유사한 일이 벌어졌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화들짝 놀란다.

참고로 아래에 뉴욕타임스 서평을 링크한다.

리우 올림픽과 샤라포바

샤라포바가 도핑파문으로 2년간 출장 정지를 받았다. 테니스 팬들에게는 아쉽겠지만, 올해 리우에서는 샤라포바의 강한 샷과 괴성은 없을 듯.

두달 앞으로 다가온 리우 올림픽은 여러모로 우려가 되는데, 대표적으로 도핑문제가 큰 이슈가 될 듯 하다. 특히 러시아 육상쪽은 너나 할 것 없이 도핑에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한다.

뉴욕타임즈는 지난달부터 러시아 선수들의 도핑 문제를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다. (이에 러시아 체육계는 NYT에 소송을 진행 중이다.) 러시아 도핑은 몇몇 개개인의 문제가 아니고 주정부 차원에서 체계적으로 이뤄져 왔다고 한다. 말이 많았던 2014년 소치. 심지어는 소변 샘플 바꿔치기 까지 했다고. 명단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상당수의 메달리스트들도 해당 스캔들에 연루되어 있다고 하니 적잖은 파문이 예상된다.